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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독서 May 12. 2022

책과 함께 사람을 읽는 시간

아홉 살, 열한 살 아이 둘과 자전거를 타고 꽃시장에 간다. 우리는 연한 분홍빛 장미 한 단을 산다. 내 자전거 앞 바구니에 장미를 비스듬히 넣는다. 우리는 달려간다. 자전거로 5분. 곧 목적지에 도착했다. 책방의 책들이 일제히 우리를 반긴다. 책방 문을 열고 들어설 때, 책방에 꽂힌 책들이 일제히 ‘안녕! 어서 와!’ 하고 나를 부른다. 착각일까? 착각이어도 좋다. 나는 책의 세계로 들어왔다. 


작년 5월부터 11월, ‘작가와 함께하는 작은서점 지원사업’으로 일산 대화동 ‘행복한책방’에서 상주작가로 활동했다. 물론 상주작가 활동 전에도 행복한책방을 알고 있었다. 난 작가고 책방이 가까이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기쁨이니까. 종종 들러 책을 샀고, 행사가 있으면 유심히 살폈다. 누군가 찾아올 때 일부러 책방으로 안내해 차를 마신 적도 있다. 어디까지나 고객의 입장이었다. 하지만 상주작가 사업은 나를 손님에서 책방의 파트너로 바꾸어놓았다. 파트너가 되었다는 것은 함께 고민하는 입장이 되었다는 뜻.  

어떤 프로그램을 할까?  

동네 분들과 책으로 어떻게 소통을 할까? 

어떻게 하면 이 빛나는 책의 세계를 좀더 알릴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을 책방과 더불어 하는 건 작품을 쓰는 것만큼이나 설레고도 어깨가 무거워지는 일이었다.


행복한책방은 주택가에 있다. 점장님이 책방을 자주 드나드는 고객들과 편히 이야기를 나누고 가족의 안부를 물을 정도로 스스럼없다. 매월 책방이 추천한 책을 받아보는 회원들도 많다. 즉 고객과 책방이 깊이 소통하고 있으며 책방의 책 추천을 신뢰한다는 뜻이다. 이런 서점의 고객들과는 어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이 좋을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몇 가지 프로그램들을 준비했다. 그중 가장 정성을 쏟은 것이 ‘말랑말랑 동화읽기’이다. 



말랑말랑 동화읽기는 한국 동화와 외국 동화로 나누어 시즌1, 2로 구성하고 상주작가와 함께 동화책을 읽으며 감상을 나누는 워크숍이다. 시즌마다 7개의 키워드를 정하고 알맞은 책을 골랐다. 시즌1에서는 시작, 유머, 죽음, 사랑, 상상, 윤리, 추리를 키워드로, 시즌 2에서는 단어, 힘, 이혼, 시간, 비밀, 능력, 우정을 키워드로 잡았다. ‘말랑말랑’이라는 말을 붙인 것은 이론적으로 접근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동화작가라는 정체성을 살리면서도 아동문학을 말랑하고 편안하게 느끼도록 돕고 싶었다. 아동문학은 문학의 뿌리이며 인간성의 근원을 다룬다고 나는 믿는다. 동화를 사랑했기에 나는 더 담백하고 유머러스하며 희망을 믿는 인간이 될 수 있었다. 물론 문학 자체는 늘 인간을 구원한다. 하지만 아동문학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분명히 있다. 한 명이라도 더 이 멋진 장르의 매력을 느끼기를 늘 고대해왔다. 좋은 기회가 온 것이다. 문학작품의 감상에 정답은 없다. 하지만 자기만의 질문을 놓치지 않고 꾸준히 작품을 읽으면 반드시 더 깊어진다. 비록 몇 달간의 프로그램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더 깊어짐을 경험하길 바랐다. 그래야만 평생 독자로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프로그램을 구체적으로 기획하며 나는 세 가지를 다짐했다. 


1. 발언을 독점하지 않는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말할 수 있게 구성하고 서로 경청하는 분위기를 만든다. 

2. 해석을 독점하지 않는다. 작가 소개나 작품의 의의 등 아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설명하되 작품을 해석하고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독자 개개인의 고유한 독서 체험임을 분명히 인식한다. 

3. 매회 모든 구성원이 작품의 감상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고 공유한다. 이를 통해 각자가 자신과 책이 맺은 관계를 확인한다. 각각의 관계가 우열을 가릴 것 없이 모두 소중하고 빛난다는 것을 믿고 그 여정을 응원하기 위해서이다. 


5월 말, 완연한 봄날이었지만 코로나라는 불청객과 함께여서인지 몸도 마음도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 예년 같으면 봄 햇살과 함께 치렀을 각종 행사들도 전면 취소였기에 5월 27일, 말랑말랑 동화읽기 첫 번째 워크샵은 2020년 나의 첫 외부 활동이었다. 잘할 수 있을까 걱정하는 마음도 잠시, 책방 문을 열고 들어오는 분들과 눈빛을 나누고 인사를 주고받았다. 금방 따스한 기운이 책방 안을 가득 채웠다. 참여자분들의 마음은 한결같았다.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고, 같이 책 이야기를 나눌 누군가가 필요하다고, 이렇게 만날 수 있어서 기쁘다고 말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너무 소중했다. 



소중했기 때문에 한 사람도 빠짐없이 주제 도서를 읽고 참여했다. 책의 빈칸과 노트에 빼곡하게 적어온 감상을 볼 때마다 콧날이 찡해졌다. 누군가 돌아가신 아버지 이야기를 하면 같이 울고, 브로드웨이에 여행가고 싶다는 소망에는 같이 설렜다. 말 안 듣는 아들 이야기에서는 함께 지혜를 모았고, 동시를 좋아하는 참여자가 주제 도서를 읽고 떠오른 시를 낭송할 때면 스르르 눈을 감았다. 

우리는 서로에게 살아있는 텍스트였고, 워크숍 때마다 책과 함께 사람을 읽었다. 천천히 꼭꼭 곱씹으며 책을 그리고 사람을 읽는 정독의 시간은 매주 귀했다.   

지역에 코로나가 확산되는 시점에는 어쩔 수 없이 일정을 미루어야 했지만, 한 회기도 놓치지 않고 계획한 모든 책을 완독했다. 말랑말랑 동화읽기는 그야말로 성공적이었다. 우리는 도무지 그냥 헤어질 수 없어 후속 모임을 만들었다. 동네에서 동화읽기의 기쁨을 이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7개월간의 상주작가 활동이 끝나고 나는 어느새 책방 가족이 되어버렸다. 대체로 예술가들이 그러할 텐데 마음을 열 때까지는 시간이 좀 걸리지만 한번 열린 문은 잘 닫히지 않는다. 올해 더 이상 상주작가로 활동하지 않는데도 종종 책방에 들러 수다를 떨고 책을 사고 소식을 나눈다. 걸어갈 수 있는 곳에 책방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든든한지. 더군다나 접촉이 두려워진 시대에 책을 통한 교감은 정신의 허기를 채우고 불안을 달래준다. 매대 앞에 서서 신간들을 내려다볼 때마다 세계를 향해 온 힘 다해 말 걸고 있는 작가들의 진심과 그 진심에 어떤 방식으로든 화답하고 싶은 내면의 욕구를 한번에 경험한다. 그 경험은 언제나 찬란해서 책방에 다녀간 날은 절로 에너지가 차오른다. 


얘들아, 이제 집에 가자. 책방 앞에서 까불며 노는 아이들을 불러온다. 딸은 소설책을 아들은 자연도감을 선택했다. 취향껏 고른 책을 바구니에 넣고 우리는 인사한다. 안녕히 계세요. 또 올게요! 나는 힘껏 페달을 밟으며 바람을 가른다. 

책이 있다. 책방이 있다. 이제야 삶이 완벽해졌다. 

며칠간 또 잘 지낼 수 있을 것이다.


박채란_동화작가, 『한 그릇도 배달됩니다』 저자


이 콘텐츠는 <동네책방동네도서관> 2021년 4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행복한아침독서 www.morningreadi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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