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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독서 Jun 14. 2022

삼거리 양복점

한자리를 꿋꿋하게 지키는 진짜의 가치

“양복 한번 입어 볼 수 있을까요?”

“그럼요.”

삼거리 양복점 두식 씨는 오늘도 정성을 다해 양복을 짓습니다.

할아버지가 그랬고 아버지가 그랬듯이

한 땀 한 땀, 더 꼼꼼히, 더 새롭게

양복 한 벌에는 짓는 사람과 입는 사람 모두의 인생이 들어있으니까요.


삼거리 양복점 

안재선 글·그림 / 48쪽 / 13,000원 / 웅진주니어



시내 거리를 걷는 건 나의 오래된 습관입니다. 특별한 일이 없어도 하릴없이 거리를 걷다 보면 여러 모습도 보이고 이런저런 생각들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늘 그렇듯 거리를 걷고 있는데 그날따라 눈에 들어오는 한 풍경이 있었습니다. 재개발을 앞둔 오래된 건물 한편에 자리 잡은 문 닫은 양복점이었습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양복점을 시작하던 연도가 표시된 간판에 시선이 머물렀습니다. 제 나이보다 세 살이 더 많은 또래 양복점이었지요. 그 주변으로 이웃하던 또 다른 양복점도 이제 문을 닫거나 이전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한때 자신의 솜씨를 뽐내던 재단사들과 그들이 만든 옷을 입은 멋쟁이들이 활보하던 이 거리는 어느새 쇠락해져 텅텅 비어가고 있었습니다. 



이 공간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요? 

이 공간 안의 사연과 이야기들은 어디로 사라지는 걸까요? 

내 나이만큼이나 나이 든 이 공간들이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괜스레 서운하고 아쉬운 감정이 느껴졌습니다. 『삼거리 양복점』은 모든 것이 너무 쉽게 생기고 쉽게 잊혀져가는 요즘, 어떤 공간이 품었던 이야기와 역사가 된 추억들을 아쉬워하며 한자리를 꿋꿋하게 오래도록 지키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만든 첫 창작 그림책입니다. 


즐겨보던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백 년이 넘은 오래된 가게들에 관한 프로그램이었지요. 할아버지가 쓰던 손때 묻은 도구와 방식으로 손주가 손수 만드는 이탈리아의 수제 우산 가게, 할머니가 먹던 사탕을 손주들까지 그 맛 그대로 파는 터키의 사탕 가게,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만들었던 국수를 파는 오백 년이 넘은 일본의 국수 가게. 그 가게에서 줄 서 먹는 할아버지와 자식들과 그의 손주들. 오래된 가게 안에는 그 가게를 꾸려가는 사람뿐만 아니라 그 가게를 찾곤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와 추억이 담겨있었습니다. 동시대 사람들에게는 그때의 즐거운 기억들이, 다른 세대 사람들에게는 소통하며 교감을 나눌 수 있는 단순한 가게 그 이상의 공간이 됩니다. 그리고 그 가게를 꾸려나가는 물건들에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랫동안 자신이 하는 일에 자부심과 소신을 갖고 주변에 흔들리지 않으며 일하는 사람들. 그리고 오래된 공간만큼 나이 든 소품과 도구들. 그런 모습들이 무척 근사하게 보여 우리에게도 저런 가게가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서울의 오래된 가게들을 조사하고 수집했습니다. 자료를 찾던 해, 서울에서 딱 백 년 된 양복점을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텔레비전에서 봐왔던 외국의 멋들어지고 북적거리는 양복점이 아닌 오래된 상가 건물 안에서 단골 위주로 운영되는 생각보다 너무나 단출한 모습이었습니다. 양복점 주인이 쏟는 정성과 노력에 비해 양복점의 모습은 너무나 작아 보였습니다. 할아버지 때부터 아버지를 거쳐 백 년의 세월을 견뎌왔지만 이제는 대를 이을 수 있을지 고민하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삼거리 양복점』을 작업하며 조금이나마 그들의 모습을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그저 오래된 공간이어서 유지되는 게 아니라 여전히 공간의 목적 그 자체로 사용되어 찾게 되는 가게가 많아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언제든 찾아가도 그 자리에 있다는 안도감과 반가운 마음이 드는 곳 말이지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다 보니 이제 서서히 ‘진짜’ 모습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요즘 소소한 생활 속에서 그런 평범한 진짜 사람들을 주변에서 많이 봅니다. 화려하게 겉을 포장하기보다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나 자신을 엄격하게 관리하면서 본인도 만족해야 일을 마치는 사람들.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자기 일을 무척 좋아하며 묵묵히 끝까지 진짜를 만들어내는 프로들 말입니다. 하지만 그 장인들이 한 공간을 유지시키고 지켜내는 건 참 어려워 보입니다. 너무 교과서적인 이야기일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세상이 빠르고 편리하게 바뀌어도, 하루가 멀다 하고 사라지고 다시 생겨나는 건물들과 가게, 사람들, 관계 속에서도 사람들은 진짜들의 가치를 알아보고 찾아갈 거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찾아가는 공간 속에서 묵묵하게 우러나오는 새로운 이야기와 추억이 켜켜이 쌓일 거라 믿습니다. 



무작정 걷다 발견하게 된 오래된 양복점으로부터 초짜 그림책작가로서 내 모습도 대입해봅니다. 빠른 변화 속에서 하루하루 달라지는 매체와 소비되는 이미지들이 쏟아져 나오는 시대 속에서 느릿느릿하게 그림책을 만드는 건 어쩌면 품이 드는 미련한 작업일지 모릅니다. 많은 사람이 찾지 않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무작정 좋아서 시작한 일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삼거리 양복점』의 이야기처럼 여러 이유로 한자리에서 지속해나가는 건 큰 용기가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좋아 보이는 것만을 무작정 좇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무엇인가를 꿋꿋이 해나가는, 반질반질 손때 묻은 도구들과 이야기 가득한 오랜 공간의 주인이 되어 그곳을 찾아오는 손님들과 오래오래 교감하고 싶습니다. 오랫동안 한자리를 용감하고 꿋꿋하게 지키며 어딘가에 있을 삼거리 양복점처럼 말이지요.



안재선 작가는 홍익대학교에서 가구디자인을 영국 브라이튼 대학원에서 일러스트레이션을 전공했습니다. 오래된 것들은 현재와 이어져 있다는 생각을 하며 작업합니다. 2014년 『안녕! 서울』 2017년 『삼거리 양복점』으로 이탈리아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에서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로 선정되었습니다.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19년 6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행복한아침독서 www.morningreadi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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