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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독서 Oct 21. 2022

‘그림 속 텍스트’를 통해 읽는 그림책

깊이 읽는 그림책 세계 4

그림책은 시와 마찬가지로 텍스트가 길지 않은 까닭에 모든 단어의 무게가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림책에서 글자는 이미지 안에도 자리를 잡고서 나름의 기능을 담당하기도 한다. ‘그림 속 텍스트(intraiconic text)’는 문자가 이미지 속으로 침투해 들어간 경우인데, 이미지와 문자 사이에 물리적 거리가 없어짐으로써 오히려 이 둘 사이의 이질성을 부각시켜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기에 특별한 기능을 담당할 수 있다. 그림 속 텍스트는 간판에 새겨진 가게 이름, 옷에 새겨진 브랜드 명칭, 과자 봉투에 새겨진 제품명, 신문의 기사 제목 등이 예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문자가 마치 이미지의 일부인 것처럼 표현된 경우이다.


서사의 뼈대와 테두리 역할

조프루아 드 페나르의 『제가 잡아먹어도 될까요?』에서는 그림 속 텍스트가 한편으로는 서사의 뼈대를 이루고, 다른 한편으로는 전체 서사 세계를 둘러싸는 프레임과 같은 역할을 한다. 

이 그림책은 늑대 루카스가 집을 떠나 독립적으로 살아가기 위한 여정에서 겪게 되는 사건을 그린 것인데 옛이야기를 패러디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의 옛이야기를 패러디했다기보다는 옛이야기에서 항상 악역을 담당했던 늑대라는 등장인물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악역을 맡았던 등장인물이 선한 역할로 나옴으로써 반전의 재미를 주는 패러디인 셈이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 옛이야기를 패러디하는 핵심에 그림 속 텍스트가 있다. 루카스가 부모의 집을 떠날 때, 아빠 늑대가 루카스에게 먹잇감 목록을 건네고, 루카스는 길을 가는 중에 우연히 이 먹잇감들과 마주치게 된다. 하지만 마음 약한 루카스는 살려달라는 이 먹잇감들을 잡아먹지 못한다. 그러다 나쁜 거인의 집에 이르러서 거인을 잡아먹고 거기 잡혀있던 엄지동자와 형제들을 구해주게 된다. 그리고 루카스는 아빠가 적어주었던 전통적인 먹잇감들을 모두 지우고 목록에 새로운 먹잇감인 “사람 잡아먹는 거인”을 적는다.

ⓒ베틀북(『제가 잡아먹어도 될까요?』)

아빠가 루카스에게 건넨 먹잇감 목록에는 “엄마염소와 아기염소, 빨간 모자, 아기돼지 삼형제, 피터, 엄지동자와 형제들”이 적혀있다. 즉 옛이야기에서 늑대에게 잡아먹힐 위험에 처했던 대표적인 등장인물들을 적어놓은 것이다. 이 먹잇감 목록은 이미지 안에 등장하는 그림 속 텍스트로서 이 서사의 뼈대 역할을 하면서, 이 작품이 옛이야기와의 상호텍스트적 관계에 기반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이 작품에는 또 다른 중요한 그림 속 텍스트가 있다. 루카스가 거실에서 부모님께 독립하겠다고 말하는 장면에 등장하는데, 신문의 기사 제목이 그것이다. 기사 제목은 “어린이 유괴범 수배”([그림 2])이며, 아빠 늑대가 신문을 들고 있는 모습은 독자들이 주목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이 기사 제목은 뒤표지 이미지에 등장하는 그림 속 텍스트인 또 다른 기사 제목 “이제는 안심! 사람 잡아먹는 거인 사라지다!”와 기사 내용 “엄지동자의 말에 따르면...”과 대구를 이룬다.

[그림 2]에 나오는 신문 기사 제목인 그림 속 텍스트는 루카스를 중심으로 벌어진 사건의 전말이 무엇인지 더 넓은 앵글에서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즉 루카스는 배가 고파 ‘나쁜 거인’을 잡아먹음으로써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어린이 납치 사건을 자신도 모르게 해결한 것이었다. 따라서 신문 기사는 이 사건의 처음과 끝을 알려주는 역할을 함으로써, 마치 루카스 이야기의 테두리처럼 기능한다고 할 수 있다. 『제가 잡아먹어도 될까요?』에서 그림 속 텍스트는 서사의 뼈대를 구축하고 사건의 전말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면서 은밀하게 서사 전개에 깊이 관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서사 전개와의 긴밀한 관계

그림 속 텍스트가 될 수 있는 신문 기사 제목이 이렇게 수수께끼처럼 삽입되어있지 않고, 텍스트에서 말하는 사실을 재확인해주는 명시적인 방식으로 들어가 있기도 한다. 토미 웅거러의 『개와 고양이의 영웅 플릭스』에서 고양이 부부 사이에서 어이없게도 강아지가 태어나자 신문에 기사가 실리게 된다. 텍스트에는 “테오네 이야기는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렸어요”라고 되어있으며, 그림 속 텍스트인 신문 기사 제목을 통해 어떤 식으로 기사가 실렸는지 확인할 수 있다.

이 작품에는 서사 세계의 핵심 메시지와 관련이 있는 또 다른 그림 속 텍스트도 있다. 플릭스가 연인 미르차를 부모님께 소개하려고 하자, 부모님은 고양이 도시의 최고급 식당에 이 둘을 초대한다. 그런데 이 식당의 벽에는 “개들은 바깥에서 기다리세요”라는 안내판이 걸려있다. 즉 고양이들을 위한 최고급 식당에 개들이 들어올 권리는 없다는 뜻이다. 그림 속 텍스트인 이 안내판의 글귀는 서로 다른 고양이와 개 사이의 갈등,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 모습, 서로에 대한 차별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더 나아가 생물학적 차이에 의해 비롯된 불평등과 차별이 만연한 인간 사회를 비판하는 『개와 고양이의 영웅 플릭스』의 주제와 관련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도 『제가 잡아먹어도 될까요?』와 마찬가지로 그림 속 텍스트는 서사 전개와 긴밀한 관계를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의 그림 속 텍스트는 『제가 잡아먹어도 될까요?』에서보다 서사 전개와 긴밀한 관계를 더 명시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세계와 관점의 표현

그림 속 텍스트는 텍스트의 화자가 표현하는 것과는 다른 것을 독자에게 제시하기도 한다. 조은영의 『달려 토토』는 말을 좋아하는 꼬마가 어느 날 할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진짜 말을 볼 수 있다는 흥분을 안고 처음으로 경마장에 가게 되지만, 정확한 이유도 모른 채 결국에는 진짜 말이 있는 경마장에 가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게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그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일러스트레이션과 그 속에 간간히 나오는 그림 속 텍스트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보림(『달려 토토』)

펼침면 [그림 3]에서 볼 수 있듯이, 어른들은 곳곳에 무리지어 “경마문화” “명승부” 등과 같은 경마 관련 잡지를 들여다보고 있다. 또한 이것이 돈과 관련된다는 것은 왼쪽 윗부분에 있는 “BANK”를 통해 알 수 있다. “경마문화” “명승부” “BANK”는 어린이 화자가 이해할 수 없는 어른들의 세계를 상징하는 그림 속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텍스트의 화자인 꼬마는 “사람들은 뭔가를 보거나 뭔가를 쓰거나 뭔가를 고민했다”라고 하는데, 이 꼬마가 “뭔가”라고 표현한 것이 무엇인지 일러스트레이션과 그림 속 텍스트가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달려 토토』에서 텍스트는 어린이 화자의 관점에서 서술되었다면, 그림 속 텍스트에는 이 어린이 화자의 시선을 넘어선 또 다른 현실의 세계가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텍스트와 그림 속 텍스트의 공존을 통해 어린이와 어른의 세계가 절묘하게 대립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작가의 현실 세계와 연관되어있는 그림 속 텍스트도 있다. 유설화의 『슈퍼 토끼』의 한 펼침면에는 작가가 이전에 내놓은 그림책 표지들이 마을 건물을 간판처럼 장식하고 있다.

작가의 이 작품들을 이미 읽었다면 [그림 4]에 나오는 간판들이 『슈퍼 거북』 『밴드 브레멘』 『으리으리한 개집』등 그림책 제목에 기반한 것임을 알아챌 것이고, “책읽는곰 출판사”는 작가의 그림책을 발행한 실재의 출판사임을 알 수 있다. 굳이 더 따지자면, 그림책 제목은 어린이와 어른 독자 모두 쉽게 알아챌 수 있을 것이고, 출판사 이름은 어른 독자에게 더 쉽게 인지될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전작의 제목들과 출판사 이름을 가게 간판 이름으로 활용함으로써 독자에게 일종의 연상 게임을 하는 즐거움을 준다.

ⓒ책읽는곰(『슈퍼 토끼』)

이 경우보다 작가와의 연관성을 찾아내기가 좀더 어려운 그림 속 텍스트도 있다. 콜린 톰슨의 『영원히 사는 법』 『태양을 향한 탑』에는 ‘맥스 카페’라는 그림 속 텍스트가 등장한다. 사실 이야기 전개와 상관이 없어 보이는데, ‘맥스’는 콜린 톰슨이 무척 사랑했던 반려견의 이름이며, 작가의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심지어 ‘Cafe Max(맥스 카페)’ 카테고리도 있다. 작가와 작품 세계의 세세한 것까지 알고 있다면 이 작은 그림 속 텍스트를 눈여겨보고 웃음 지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림 속 텍스트는 이미지의 일부이기에 독자의 시선을 끌 수도 있지만, 텍스트가 아니기 때문에 소홀히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간단한 문구들이 그림책의 서사 전개와 주제, 또 다른 관점을 표현하기도 하며, 작가의 개인적 삶에 대한 힌트가 되기도 한다. 그림책에서는 앞표지부터 뒤표지까지 의미 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했던 누군가의 말처럼, 그림책이 담고 있는 의미 세계는 세밀한 관찰과 더불어 더욱 더 드러난다.


이성엽_『그림책, 해석의 공간』 저자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2년 8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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