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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독서 Nov 18. 2022

온전히 즐기며 기대하는 또 다른 오늘

그곳에 멈춰 서서 깊게 숨을 들이마셨어.
오랜만에 온몸의 감각이 깨어나는 것 같았어.
문득, 오래 잊고 있던 내 이름이 생각났어.
내 이름은… 오늘이야.



내일

백혜영 글·그림 / 44쪽 / 14,000원 / 고래뱃속



비엔나 여행을 하던 중, 낮잠에서 깨어나 문득 그림책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평소 낙서도 하지 않는 편이고, 그림과 무관한 컴퓨터공학을 공부해서 IT 기획자로 회사에 다니던 저에게는 뜬금없이 찾아온 생각이었어요. 영감을 얻는 꿈을 꾸었다고 하기에는 아무런 꿈도 꾸지 않았어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꾸준히,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보고 고민했던 것들이 나도 모르게 가슴속에 자리 잡고 있었나 봐요. 더 이상 마음 깊숙한 곳에만 있을 수 없었는지, 펑 터져서 어느 오후 비엔나에서 내가 알게 된 게 아닐까요? 여행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날 불쑥 든 생각을 실현하고자 밑도 끝도 없이 그림책 수업을 알아보았어요. 그렇게 막연한 호기심으로 시작한 새로운 취미에 곧 깊이 빠져들었어요. 

이야기는 ‘지나간 내일’이라는 한 문구를 만들면서 시작됐어요. 

꺼져가는 불씨처럼 몸도 마음도 많이 지쳤을 때였어요. 몸은 오늘에 있지만 영혼은 내일에 붙들린 채, 내일을 위해 오늘을 매일 희생시키고 있었어요. 너덜너덜 지쳐서 내일이 안 왔으면 좋겠다고,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고 끊임없이 외치다가, ‘내일이 벌써 지나갔다면?’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순간, 머릿속에 가득했던 걱정과 고민이 정지화면처럼 툭 끊기고 멍해졌어요. 시간이 털썩 주저앉은 듯 하염없이 흘렀어요. 

‘내일만을 바라보고 달려왔는데 내일이 없어진다면… 오늘 뭐 하지?’

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제야 내일을 준비하느라 미뤄뒀던 일이나 스스로 막고 있던 생각이 마구 떠올랐어요. 그렇게 이야기가 시작됐습니다. 


『내일』은 주인공이 항상 앞서가는 노란색 녀석을 매일 정신없이 따라가는 이야기입니다. 모두가 녀석을 향해 가고 있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숨 가쁘게 그를 따라가게 됩니다. 혹시 녀석에 대해 아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 과학자, 미래학자, 점술가에게 답을 구합니다. 미친 듯이 속도도 내보고 힘겹게 계단을 올라도 보지만 녀석은 자꾸만 멀어져요. 지치고 넘어지고 길을 잃어 내일을 기약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알게 됩니다. 오늘의 길 끝에서 만나는 것은 결국 내일이 아니라 또 다른 오늘이라는 것을요. 책의 마지막에서 길의 방향은 반대로 틀어집니다. 내일에 붙들려있던 마음을 오늘로 돌리니, 원래 오늘을 가득 채우고 있던 것들이 각자의 색을 찾으며 눈에 들어오게 됩니다. 흐릿했던 내일은 그제야 선명해지며 저 멀리서부터 오늘을 따라옵니다. 내일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는 없지만, 오늘의 내가 웃고 있다면 내일의 나도 쌍둥이 같은 얼굴로 웃고 있지 않을까요? 


제가 그림책을 만드는 동안 그림책은 저를 만들었어요. 스케치 전의 흰 도화지처럼, 오늘의 나를 무표정으로 만들던 것들을 모두 정리했어요. 맛있는 음식과 멋진 옷, 따뜻한 집, 빛나 보이는 직장 모두 내려놓았어요. 내일을 위해 바쳤던 모든 오늘을 버린 것만 같아서 한동안 눈물이 멈추지 않았어요. 2년에 걸쳐 원고가 조금씩 다듬어지고 살이 붙을수록 저도 아주 조금씩 회복해갔어요. 따라갈 내일이 없어지니 저는 매일 그림을 그리고 있었어요. 종이가 무거울 정도로 가득 찬 마지막 장면처럼,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이제는 각각에 알맞은 모습과 다채로운 색을 찾아 오늘의 저와 함께하고 있어요. 저의 이야기 끝에서는 ‘내일’이 ‘오늘’을 따라오지만, 사람마다 책을 읽고 다른 결말을 떠올렸으면 좋겠어요. 오늘을 위해 살고 싶은 사람도 있고, 내일을 위해 살고 싶은 사람도 있어요. 때에 따라 바뀌기도 하고요. 『내일』을 읽고서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지, 어떤 삶에 마음을 쏟고 싶은지 생각해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책을 만드는 동안 저에게 오늘은 ‘그림책’이었어요. 좋은 그림책을 만나고, 직접 이야기를 지으며 그림을 그리고, 어떻게든 작업실을 구해 가꾸는 하루하루가 빛나고 선명했어요. 오직 그림책에만 몰두하고 싶었어요. 『내일』을 출간한 뒤, 요즘 저에게 오늘은 ‘균형’이에요. 이제 저는 다시 맛있는 음식과 편안한 옷, 새로운 집, 새로운 직장으로 오늘을 채웠어요. 물론 그림책도 저의 오늘을 채우고 있어요. 같아 보이지만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요. 이제는 내일이 저를 따라와요. 시간이 지나면 저에게 오늘은 또 바뀌겠죠. 하지만 더는 타인의 시선과 내일의 불안에 잠식되지 않고 오늘을 온전히 하나하나 즐기며 내일이라는 또 다른 오늘을 기대할 거예요. 



백혜영 작가는 컴퓨터공학을 전공하고 내일을 따라가다가 우연히 그림책을 만났습니다. 그림책과 함께 그동안 잊고 있던 오늘을 즐겁게 살고 있습니다. 어린이와 어른 모두에게 울림을 주는 그림책을 만들어가려고 합니다.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2년 4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행복한아침독서 www.morningreadi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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