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아의 그림책으로 보는 세상
보자기 한 장
정하섭 글 / 정인성, 천복주 그림 / 72쪽 / 22,000원 / 우주나무
“나의 밤은 잠 못 들어 / 널따랗고 거친 보석을, / 길 건너 동판 지붕을 응시하고 / 시인에 대해 생각한다 / 이 어둠 속에 아직 태어나지 않았지만 / 이 시간들의 목구멍이 되어줄 이를. / 아니, 그 시간들이 되어줄. / 누가 이날들에 대해 말할까, / 내가 아니라면, / 당신이 아니라면?”
위에 인용한 시는 뮤리얼 루카이저의 시 「어둠의 속도」 마지막에 나오는 부분이다. 그림책 『책의 아이』에서 올리버 제퍼스와 샘 윈스턴이 헌정하는 페이지에 나오는 “우주는 원자가 아니라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도 이 시에서 인용된 시인의 문장이다. 필자는 이 시행이 너무 매력적으로 생각되어 우리나라에 뮤리얼 루카이저의 『어둠의 속도』가 출간되자마자 빛의 속도로 시집을 사 읽었다. 그리고 다시 시집을 꺼내어 읽는다. 자신이 겪은 걸 쓰는 시인은 “경험을 들이마시고 시를 내쉬어라”라고 「어린 시절로부터의 시」에서 말한다. 어린 시절의 경험이 시가 되고 삶의 경험이 시가 된다는 이야기이다. 그림책도 마찬가지이다. 작가의 삶과 경험, 개인적·사회적 관심이 그림책에 녹아 있다.
『보자기 한 장』은 평생 ‘옷감 짜는 일’을 하던 할아버지가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느끼고 “남에게 충분히 베풀며 살지 못한 것 같”아 삶의 마지막 작품으로 ‘보자기’를 짜는 모습으로 시작하는 이야기이다. 이어 ‘노란 보자기’는 바람에 실려 날아가 어느 할머니의 사랑과 정성을 감싸는 보자기가 되고, 어느 아이의 노란 망토가 되고, 슬픔에 빠진 아이의 노란 머리끈이 되기도 하며 등장인물과 보자기의 쓰임새가 달라진다. 그리고 이야기와 그림은 어떻게 펼쳐질까?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넘기는 독자만이 각 페이지의 조각을 이어 붙이듯 ‘보자기 한 장’ 이야기에 커다란 감동을 담을 것이다.
보자기는 단순한 보자기가 아니라 할아버지가 “온 정성과 한없는 사랑과 간절한 바람”을 불어 넣어 마술적인 오브제가 된다. 옷감을 짜는 할아버지의 전기처럼 시작되는 이야기는 어느새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보자기에 의해 환상적인 이야기로 펼쳐지는 듯하지만, 다시 사실주의적인 현실 세계로 이어진다. 글에서는 보자기 색을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독자는 그림에서 보자기 색이 노란색이고, 할아버지가 방 안에서 달을 보며 소원을 말하는 장면에서 보자기는 달빛을 닮은 보자기라는 걸 알 수 있다. 보자기는 “보는 사람에 따라 색깔이며 무늬가 달라 보이는 신비한 보자기”라고 텍스트에서 발화된다.
앞뒤 면지에서 볼 수 있는 노란색은 ‘노란 보자기’로 페이지를 연결하는 리듬을 만든다. 할머니의 딸에 대한 사랑, 남편을 위해 생일 도시락을 준비한 아내의 모습, 일터를 잃은 가장이 택배 상자를 배달하며 추위를 견디게 해주는 목도리가 되었다가 다시 바다로 도시로 날아간다.
할아버지의 가족사진엔 자랑스럽고 행복했던 장면 이미지만 볼 수 있다. 삶엔 희로애락이 포함되어 있는데 사진과 사진, 아니 그림과 그림의 틈 사이에서 화나고 슬픈 일은 보이지 않는다. 단지, 할아버지의 주름 속에 다사다난했던 일이 새겨져 있을 것이다.
인생의 끝자락에 선, 할아버지의 죄책감은 타인에게 베풀며 살지 못한 점이다. 이 그림책을 보며 떠오른 건 연초에 본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이다. 경상남도 진주, 남성당한약방 주인으로 평생 한약사로 살며, 이타적인 마음으로 살아온 어른 김장하의 삶이 다큐멘터리로 조명되며 우리 사회에서 ‘진정한 어른’의 모습이 어떤 삶인가 되새기게 되는 기회가 되었다. 김장하 어른이 하신 말씀이 다시 떠오른다.
『보자기 한 장』에서 노란 보자기는 어쩌면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즉각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보름달처럼 둥근 ‘돈’의 은유이자 따스한 관심이다.
21세기인 지금도 전쟁과 대참사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뉴스를 통해 생생하게 전달받는 시청자는 안방에서 폭력적인 시청각 이미지에 지속적으로 노출된다. 그로 인해 폭력적인 이미지 잔상으로 트라우마가 남거나, 시청각 미디어가 자극하는 사고와 사건 이미지로 인해 사람들이 점점 무감각해지는 건 아닐까?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현실 세계에서 정보와 사건이 넘쳐나는 시대에 그림책작가는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가? 독자는 또 어떤 그림책을 펼칠 것인가? 평화를 이야기하는 작가는 전쟁의 참상을 폭로하는 데 독자의 마음을 고려하며 이야기한다. 예를 들어, 토미 웅게러는 『곰 인형 오토』에서 전쟁의 참상을 그리며 주인공으로 곰 인형을 선택한다. 이야기 화자가 무생물인 곰 인형이라서, 제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이야기하면서도 독자가 받는 충격의 완충 역할을 한다.
세상은 선과 악이 분리된 이분법적인 세계가 아니라 선과 악이 너무 오밀조밀하게 엮어져 있다. 신자본주의 사회로 변해버린 시대에, 자식이 성공하길 바라는 부모가 자신의 욕망으로 인해 어느새 ‘괴물’처럼 변하고, 학생을 가르치는 어른으로 존중받지 못하는 젊은 교사는 학교에서 자살하는 슬픈 시대가 되었다. 비참하고 슬픈 이야기는 보자기에 꽁꽁 묶어 서랍 속 깊이 묻어둘 것인가? 아니면 ‘달빛’으로 실을 만들어 희망을 주는 이야기 보자기를 만들 것인가?
김시아(KIM Sun Nyeo)_연세대 연구교수, @kim_sia_sun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3년 12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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