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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도 봄이 올까요?

그림책과 나 - 한연진

by 행복한독서

저는 과학과 미술을 좋아하던 아이였어요. 중학생 때 자연스레 만화로 관심이 틀어지더니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잇츠’라는 만화책도 만들어 발간하곤 했죠. 여러 사정으로 미술 전공의 길은 걷지 못했지만, 이과생이 된 저는 IT회사에서 일하다가 대리를 달 수 있는 4년 차에 그림을 그리겠다며 회사를 박차고 나왔습니다. 당시 저는 서른 살이었어요. 저의 팀장님은 이 나이에 무슨 꿈을 꾸냐며 핀잔을 주셨지요. 하지만 그런 말을 홀홀 날려버릴 만큼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있었어요. 때가 되었다는 그런 것이요.

그림7-한연진 작가.png ⓒ한연진

그러다 자연스러운 섭리처럼 만난 그림책은 글 쓰는 것과 그림 그리는 일을 모두 좋아하던 저에게 큰 매력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세계로 첫 문을 열어준 그림책은 김동수 작가의 『감기 걸린 날』이에요. 간결한 그림과 강렬한 메시지가 버무려진 그림책에 매료되어 ‘이렇게 재밌는 것이라면 나도 해보고 싶다’라는 마음이 더해졌어요.


처음으로 그림책을 공부했던 ‘꼭두’ 일러스트 그림책 학교에서 첫 책을 만들었어요. 바로 빨간 길을 인생으로 비유한 『빨강차 달린다』예요. 첫 책이 출간되면서 저는 그림책작가로 또 일러스트레이터로 자리 잡을 것을 기대했어요. 하지만 현실은 차가운 겨울 같더군요. 첫 책과 함께 결혼과 출산, 육아를 병행하면서 늘 새로운 더미를 만들고 그림을 공부하며 지냈어요. 하지만 혼자일 때보다 물리적인 시간과 마음적 여유가 부족했어요. 더불어 탄탄한 실력도요. 그렇게 투고와 외주 제안 모두 반려되었고, 몇 년간은 시리고 추운 날들과 같은 시간을 겪어야 했어요. 경제적으로도 어렵고 상황도 받쳐주지 않으니, 빛 하나 없는 터널의 어딘가를 걷는 느낌이었어요.


가장 추운 겨울 뒤에는 봄이 온다고 하잖아요. 인고의 시간 뒤, 반짝이는 보석같이 태어난 옥수수의 넉넉한 쓰임에 대해 이야기하는 『옥두두두두』가 출간되었어요. 바로 이어 자연과 그들의 공생을 이야기하는 『끼리코』도 같은 해에 나왔지요. 작년에는 감사하게도 네 권의 책을 연속해서 출간하게 되었어요. 어릴 때부터 눈물이 많은 저에게 보내는 편지 같았던 『눈물문어』, 귀여운 오리들이 만드는 가을 『가을이 오리』, 편견을 지우는 작은 한 걸음 『우리 반 문병욱』(이상교 글) 그리고 봄을 찾아 떠나는 이야기인 『숨은 봄』이요. 작업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지냈던 한 해였지만 보람찬 2023년으로도 기억해요.


숨어있는 봄, 숨 = 봄

『숨은 봄』은 우수출판 콘텐츠 선정작으로 아이와 작은 새가 봄을 찾아 떠나는 내용이에요. 이 책은 ‘Wild Animal’이라는 동물 그림 시리즈를 그리면서 시작된 이야기예요. 야생 동물들의 경계하는 눈빛이 담긴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마음이 커져서 동물을 하나둘 그리기 시작했고, 그 아이들을 그림책에 출연시키고 싶은 사심으로 이야기를 엮었어요.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지만 덕분에 여러 동물들이 나오는 장면에서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힘이 생겼어요.

그림7-그림7-숨은봄_본문.png ⓒ문학동네(『숨은 봄』)

다시 『숨은 봄』 이야기로 돌아와서, 아이가 봄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첫 번째로 아이의 망설임 없는 호의로 시작돼요. 이를 딱딱 부딪히며 추워하는 작은 새를 위해 칼바람에도 선뜻 문을 열어 환대해 준 그 마음이요. 아이와 새는 서로를 의지하며 뚜벅뚜벅 봄을 찾으러 떠나죠.


두 번째로 동물들의 숨 방울 덕분이에요. 제가 추운 겨울을 버티던 시절 주변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숨 방울들을 설정했어요. 눈표범처럼 묵묵히 저의 곁을 지켜준 가족들, 올빼미처럼 지혜를 나누어주는 동료 작가들, 포근한 미소와 싱그러운 용기, 대가 없는 호의를 베풀어준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보내줬던 따뜻한 숨 방울들이 저를 버티게 해준 원동력이었더라고요. 혹시 겨울을 보내는 이가 있다면 저의 작은 숨을 보태고 싶어요. 봄을 만날 거라는 마음 가득 담아서요.


앞으로 저는 재미있고, 맛 좋고, 마음에 남는 그림책을 만들고 싶어요. 한 장 한 장 이어서 다음 장을 넘기고 싶게 만드는 재미가 있는 그림책, 그림과 글이 맛있는 그림책, 읽고 나면 무언가 마음에 따스하게 남는 그런 그림책을요.


*‘Wild Animal’ 시리즈 원화와 『우리 반 문병욱』 『숨은 봄』 그림책 전시가 3월 한 달간 카페 콤마 여의도점에서 진행됩니다.


한연진_그림책작가, 『숨은 봄』 저자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4년 3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행복한아침독서 www.morningreadi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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