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 안에는 아이가 산대
헨리 블랙쇼 지음 / 서남희 옮김 / 36쪽 / 13,000원 / 길벗스쿨
흔히 이렇게 내면에 존재하는 또 다른 나를 우리는 ‘내면 아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어렸을 적 부모로부터 소중하고 존재로서 가치가 있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마땅한 사랑과 지지를 받아보지 못했을 때 심리적 구멍이 생긴다. 우리의 내면은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밑 빠진 독과 같은 상태가 되는데 그런 어렸을 적 기억과 상처로 자신의 내면이 치유되지 않았다면, 성인이 되었어도 내면은 그런 상태로 있는 것을 심리학적으로 표현한 용어이다.
내 안의 내면 아이의 나이뿐 아니라 내면 아이가 어떤 감정이고, 또 어떤 말들을 듣고 싶어 하는지, 어떤 분위기에 마음이 편안한지 등을 조목조목 확인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정확한 내 감정의 근원을 만날 수 있다.
심리학 공부를 하면서 이론을 배울 때마다 내 안의 괴물이 어떤 성격을 소유하고 있으며 어떤 말에 화를 내고 어떤 감정에 유독 반응을 하는지 알게 되었다. 내가 겪게 되는 심리적 불편함을 이론에 비추어 머리로 이해하면서 어느 정도는 묻어둘 수 있었고 정리도 할 수 있어서 편안함을 느꼈다. 그러나 머리로 이해되는 그 감정이 가슴으로 절절하게 와닿지가 않았다. 내 서러움, 밑도 끝도 모르게 올라오는 그 서러움으로 누군가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도 눈물을 흘리는 나를 그런 일시적 편안함으로 감출 수는 없었다. (…) 내내 허기진 배고픔의 근원이 엄마를 향한 사랑고픔임을 알았다. 내가 당연히 받아야 했을 사랑을, 배려를, 맏이라는 책임으로 눌러놓고 어른인 양 마땅히 해야 한다는 당위에 눌려 할 말을 못하고 울지도 못했던 억울함이 녹아 있었다. 그 억울함이 나를 굶주리게 했고, 그런 사랑고픔은 늘 젖을 달라고 울다가 지친 아기의 서러움과 맞닿아 있음을 알았다. (『아픈 영혼, 책을 만나다』 중에서)
이렇게 정확히 파고 들어가 알아야 무의식에서 올라오는 감정의 요동침에 그냥 당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무의식을 스스로 다스릴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우리가 건드릴 수 없는 게 무의식이지만, 불편한 감정의 원인을 옛 기억에서 찾아내고 그것을 차츰 조절해 가는 일은 가능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감정을 주체적으로 다스리게 되면 맥없이 받아내기만 하느라 힘들었던 무의식의 상처로부터 훨씬 자유로워진다.
“그거 알아? 어른들 안에는 아이가 산대! 어른들이 춤출 때, 갖고 싶은 게 생겼을 때, 사랑한다고 말할 때… 어른들을 살펴봐. 얼마나 유치하고 웃긴지, 꼭 애들 같거든. 어른들은 이런 모습을 숨기려고 해. 하지만 생각해 봐. 안에 분명히 살고 있는 아이를 어떻게 꼭꼭 숨길 수만 있겠어? 이 아이들은 시간이 흘러 나이가 들수록 더 자주 튀어나온다고!”
헨리 블랙쇼가 쓰고 그린 『어른들 안에는 아이가 산대』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이다. 짧은 문장에 너무도 잘 녹여낸 내면 아이의 모습과 속성을 보고 있으면 우습기도 하고 뜨끔하기도 하다. 어린 시절에 겪는 감정들이 내면에 아이로 남아 심리 상태를 결정하고, 나아가 성격을 만든다는 것이 그림으로 고스란히 보여지는데 “못된 어른들 안에는 못된 아이가 있지”라는 대목에 이르면 이 내면 아이가 형성되는 어린 시절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지난 장에서 자신을 마주하는 용기를 내라고 했는데 사실 그것이 말처럼 쉬운가? 그러나 내가 하는 독서 치유와 그림책 치유가 이러한 저항감을 적절히 에두르게 하는 힘이 있어 책을 보면서 남을 보듯이 어린 시절 받은 상처와 꽁꽁 숨기고 있던 그 아이를 재미있게 보면 된다. 그러다 문득 내 안에 아이를 마주 보게 되는 순간을 맞게 된다면 도망치지 말고 슬픔을, 무서움을, 어쩌면 기쁨을 매일같이 참아 왔던 스스로의 진짜 감정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된다.
이렇게 해서 불편한 감정의 원인을 알게 된다 해도 그것만으로 감정이 쉽게 다스려지지는 않는다. 어린 시절의 지독한 외로움, 엄마에게 받은 모멸감, 저녁노을이 주는 처량한 조바심, 이런 것들이 단지 머리로 이해한다고, 심리상담 몇 번 받는다고 내 삶에서 바로 사라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가 이래서 이런 반응을 하는구나 하고 스스로 알게 되면 일단 마음이 편해진다. 그리고 늘 그것을 의식하고 있으면 차츰 감정도 조절할 수 있게 된다. 적어도 뒤통수 맞듯 갑자기 감정의 파고에 휩쓸리며 당황하거나 무기력한 상태에 빠지지는 않게 된다.
“무의식아, 무의식아.” 우리 집 예쁜 강아지 이름처럼 부르는 거다. 아니면 그 오랜 상처에 이름을 하나 붙여주는 것도 좋다. 친구처럼 이름을 불러가며 대화를 나누고, 달래주고, 너를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진심으로 용서도 빌어보고, 이제부터는 함께 이겨내자고 손가락 걸어 약속도 한다. 그러다 보면 차츰 반사적으로 예민해진다거나 통제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이는 경우가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전보다 훨씬 의연하게 서있는 자신을 대견하게 바라보게 될 것이다.
무의식은 나의 적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다. 어떤 불편하고 두려운 감정도 그게 바로 나 자신이었고 현재의 나다. 다만 그런 감정을 앞으로도 계속 끌고 가지는 말자는 이야기다. 무의식 안에서 울고 있는, 무서워하는, 외로워하는, 미칠 듯 분노하는 아이를 사랑하고 다독거리는 것이 지금 내가 나 자신을 위해 할 일이다. 내 안의 또 다른 나, 지금 현재의 나에게 그 ‘나’는 좀 낯설어 보이겠지만, 그 ‘나’를 무시하고 피하기만 하면 온전한 나는 결코 만날 수 없다. 나를 만나기 위해 또 다른 나를 사랑하자. 나를 사랑하기 위해 또 다른 나를 만나자.
김영아_독서 치유상담사, 『내 마음을 읽어주는 그림책』 저자
-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4년 4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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