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그림책작가의 세계 - 정진호
첫 그림책 『위를 봐요!』(2014)로 2015년 볼로냐 라가치 오페라프리마 부문 상을 받고, 곧이어 2018년 『벽』(2016)으로 예술·건축과디자인 부문 상을 받은 정진호 작가가 건축학도였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의 졸업작품이 혹평을 받았다던 일은 얼마나 알려져 있을까? 2022년 보고타국제도서전 청중 앞에서 털어놓은 일화다. “그건 건축이 아니다”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나는 그림책으로 건축을 한다’며 길을 뚫던 작가는 자신의 신념이 인정받은 것 같아 벅찼다고 말한다. 미국, 프랑스, 벨기에, 대만, 일본 등으로 소개된 『위를 봐요!』를 필두로 한 『벽』과 『별과 나』(2017)는 건축 그림책 3부작으로도 불리며 건축 그림책작가로 정진호의 입지를 다져주었다.
엉뚱해 보일 수도 있는 이런 인생행로 변경의 견인차가 ‘시선’이라는 화두임은 작가와 독자 모두 인정하는 바일 것이다. 그는 바라보고, 내려다보고, 치어다보고, 뒤돌려보고, 꿰뚫어 본다. 건축에서 배운 평면도, 단면도, 투시도 등의 시선이다. 몸에 익은 그런 시선에 신선하다는 평가가 내려지는데 그는 잠시 어리둥절했다고 한다. 당연한 거 아닌가? 그러다가 깨우쳤을 것이다. 아, 나의 시선, 나의 생각과 느낌, 나의 기법 그대로가 신선하다 평가받는구나. 그래서 그는 자신을 확실히 파악하고 작품 세계를 세워나간다. “그림에 강점이 있지는 않지만, 구조 쌓아가는 일은 잘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구조를 철저히 쌓는다. 그림 구도를 잡고, 캐릭터를 만들고, 왜 이 자리에 이 시선과 색깔이 들어가는가, 장면들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야기와 어떻게 맞아떨어지는가를 고려한다. 그렇게 그는 자기 자신을 향한 시선을 벼린다.
이 시선이 건축물이나 풍경, 종이에만 집중되었다면 그의 책은 그렇게 빛나지 않았을 것이다. 빛은, 그것들과 어우러지는 또 다른 중요한 시선, 인간과 자연을 안아 들이는 눈에서 나온다. 『위를 봐요!』에서는 아픈 아이의 외로운 시선과 그가 안타까운 다른 아이의 따뜻한 시선이 만난다. 『별과 나』는 제목 그대로 하늘의 별에게 가는 시선이다. 볼로냐에서 『별과 나』를 읽던 한 할머니가 “당신은 어떤 시골에서 뭘 봤기에 이런 그림이 나오는가” 물었다는데, 사실 그 책은 서울 한복판, 한강 다리 체험에서 나온 것이었다. 자전거로 출퇴근하던 시절 야근 뒤 만난 새벽 3시의 풍경이었다. 서울에서도 별이 이렇게 보일 수 있구나! 그에게는 새로운 개안이었을 것이다. 서울이 다시 보이고, 하늘이 다시 보이고, 자신이 다시 보였을 것이다. (이 일화를 듣고 다시 읽은 『별과 나』는 전과 다르게 각별해졌다. 작가가 그 소회를 버무린 글 텍스트를 써주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림책은 글과 그림의 앙상블이니 글도 자신이 그림만큼의 구조로 짜이기를, 그림만큼 감성을 자극할 수 있기를 바랄 것이다).
이후 그의 책은 더 다양한 바라봄을 품는다. 『3초 다이빙』(2018)과 『심장 소리』(2022)에 나오는 아이들은 자기 자신을 바라본다. 주변의 평가나 경쟁 구도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고, 누군가 붙여주는 의도와 목표에 흔들리지 않는다. 굳건한 눈으로 다이빙대에 올라가거나 앞으로 달려가는 아이들의 모습은 사선 가득한 수직 구도, 울퉁불퉁하기도 한 수평 구도 안에서 다이내믹한 안정감을 풍긴다. 그런 시선의 전진 끝에 아이들은 어떤 것과 만난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3초 다이빙 시간 뒤에 ‘같이 웃을 수 있는’ 친구들을 만나고, 자신의 심장소리와 연결된 엄마의 심장소리를 만난다. 아이들은 그 만남을 어떻게 이루는지 안다. 눈동자를 고정한 채 주위를 견디고 자신을 추스르며, 한 걸음씩 올라가고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 뒤 무릎을 모아 안고 낙하하는 얼굴에 떠오르는 미소.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난 뒤 멈춰서 가슴에 모으는 손. ‘그리운’ 엄마가 들어있는 심장소리를 들으며 감는 눈. 카타르시스 머금은 클라이맥스다. 무표정, 우울, 낙담, 힘겨움의 얼굴은 자신을 향한 단단하고 깊은 시선 끝에 환히 혹은 가만히 웃는 얼굴이 된다.
『여우 요괴』(2023)와 『금손이』(2023)에서는 시간을 거슬러 가는 시선, 인간과 고양이 혹은 인간과 여우 요괴라는 이종(異種) 존재들의 어울림을 공간적으로 구축한 구도가 눈에 띈다. 금손이 표지 커버는 격자무늬 창살로 현란하다. 평면에 그려진 숙종과 금손이가 이 격자창으로 들어가면 홀연 둘 사이의 거리, 독자와의 거리가 달라진다. 둘은 남들이 침투할 수 없는 사적 공간 안에서 서로 단단히 결속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야말로 표지가 다 했다! 앞 면지 오른편 작은 봉분은 하찮은 존재였을 길고양이 금손이의 상징일 것이다. 하지만 같은 장면이 나오는 본문 마지막 페이지, 왼편에 커다란 봉분이 덧붙는 간결·고요하면서도 다이내믹한 구도 속에서는 고양이가 임금과 같은 존재감으로 떠오른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뒤 면지에서는 두 봉분 모두 자취가 없다. 그 사라짐은 시공간 초월로 느껴진다.
면지와 마지막 페이지의 사물 이동 배치에서 어떤 초월을 느끼게 하는 것은 『여우 요괴』도 마찬가지다. 앞 면지 오른쪽 검은 산등성이 뒤로 떠오르는 빨간 해는 속표지와 마지막 페이지에서 계속 위치와 모양을 바꾼다. 그리고 뒤 면지에서는 자취를 감춘다.
이 독창적인 민담 재화에서, 자기 간을 빼먹으려는 여우 요괴까지도 품어 함께 초월하려는 김생원의 시선은 작가 자신의 시선일 것이다. 초등학교 강연을 나가면 시점 이해는 전보다 나아졌지만, 친구를 위해 길에 눕겠다는 아이들은 자꾸 줄어 안타깝다는 마음이 어디로 가겠는가. 세상의 시선이 식어갈수록 그의 시선과 작품에는 온기가 더해질 것이다.
김서정_작가, 평론가, 『판타지 동화를 읽습니다』 저자
-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4년 4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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