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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독서 Jul 01. 2024

나의 터 제주에서 봄을 들이는 마음

작가가 들려주는 그림책 이야기

봄이 들면

김영화 글·그림 / 44쪽 / 16,000원 / 이야기꽃



제주의 봄은 할망들 이야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삼삼오오 모인 할망들의 대화에서 고사리가 빠지지 않는다. “남쪽 서귀포 어느 동네에 고사리가 올라왔다더라, 어제 가 봤는데 아직은 머리만 내밀고 있다. 누구는 몇 근이나 꺾어왔다더라. 이제 고사리 쇠어져서 씨 퍼트리게 놔둘 때가 되었다.” 제주도 할망들은 그렇게 새순 돋는 계절, 봄이 들면 모두들 고사리 이야기로 시작해서 고사리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첫 그림책 『큰할망이 있었어』를 출간하고 나서 다음번에 그림책을 낸다면 고사리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더미북을 만들고 몇 컷의 그림을 그려 보았을 때쯤 제주 출신 김성라 작가의 『고사리 가방』이 출간되었다. 고사리 조금 꺾어본 사람이면 공감할 만한 이야기들. ‘이런 선수를 뺐겼구나’ 하고 잠시 미뤄두었다. 그때가 9년 전이니 꽤 오래 마음에 간직하고 있었던 셈이다.

ⓒ김영화, 이야기꽃(『봄이 들면』)

2년 전 봄, 고사리를 꺾다 꿩 둥지를 보았다. 소담하게 낳아놓은 알들, 그 옆의 굵은 먹고사리, 고사리를 꺾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사진 한 장 찍고 돌아서는데 알들이 자꾸 눈에 밟혔다. 다시 품으러 와야 할 텐데. 그래서 멀리서 지켜봤다. 까투리가 한참 후에야 조심스럽게 덤불 안 둥지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까투리들은 왜 하필 고사리밭에 알을 낳아 조마조마 하며 알을 품는지, 문득 꿩이 보는 고사리는 어떤 모습일까? 고사리가 불러들이는 천적인 사람들을 보는 꿩은 마음이 어떨까? 하는 의문이 들었고 꿩이 주인공이자, 관찰자인 고사리 이야기를 써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번득 들었다.

그림책 『봄이 들면』의 시작이었다. 이번에는 꼭 고사리 그림책을 완성하리라 마음을 먹고 고사리밭 익숙한 풍경들을 눈에 담아 두었다. 굵은 고사리가 많은 가시덤불 안쪽, 자세히 보아야 보이는 들꽃들, 하나하나가 소중한 생명들, 여기저기 파헤쳐지는 공사의 흔적들.


꿩이 화자이자 주인공인 첫더미를 출판사에 보였을 때, 편집자가 주요한 지점을 꼭 집어주었다. 본능대로 사는 꿩이 과연 고사리, 사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느냐? 라는 본질적인 질문이었다. 나는 책에 어떤 내용을 구체적으로 담고 싶었나? 그래 그러면 봄, 넓은 들판의 풍경, 하고 싶은 이야기 그림부터 그려가며 풀어가보자. 사람들의 고사리 꺾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게 아니었다. 봄이 들면 시시각각 변화하는 색, 고사리밭에서 만나는 다양한 생명들의 이야기, 살아내는 그들의 이야기, 그 안에 사람들은 잠시 다녀가는 존재, 굳이 꿩이 화자이지 않아도 되겠다. 그림을 한 장 한 장 그려가면서 드는 생각이었다. 

이 모든 것들이 머무는 자연, 봄이 들기 시작해서 깊숙하게 스며들어, 연한 연둣빛 풀들이 짙은 초록으로 무성해지는 여름이 오기 전까지 들판이 주 무대이자 주인공이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점점 들었다. 그런 그림들로 채우기 시작했다. 화사한 총천연색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다양한 봄의 색들을 서로 어울리게 어떻게 채색할까 고민하다 그 색들을 하나로 묶어주고 서로 잘 받아들여 줄 수 있는 누런 갈옷의 색, 특별한 재료(『노랑의 이름』『무등이왓에 부는 바람』에 쓰인 주색)를 바탕에 깔고 색을 입히니 노랑도, 초록도 쨍하지 않고 땅과 함께 어우러지는 색이 되었다. 고사리가 땅에서 고개를 내밀고 움츠렸던 손을 하나씩 펴는 모습 「꼼짝꼼짝 고사리 꼼짝」 제주도 전래동요가 저절로 되뇌어지고 있었다. 저 들판은 아이들이 부르던 그 소리를 기억할까, 이제 고사리 꺾으러 다니는 어린아이들은 없을 텐데…. 그림의 화자는 자연 다큐멘터리 내레이션 같은 느낌으로 써볼까? 하며….

그림이 중반을 넘어서고 있을 때쯤 출판사에 원화를 들고 갔다. 어린아이를 등장시키면 어떨까? 하는 제안이 있었다. 이제는 위험하다는 이유로 아이들은 데리고 가지 않지만 나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자 봄을 기다리는 설렘에 「꼼짝꼼짝 고사리 꼼짝」을 부르며 고사리를 찾던 모습이 겹치며 좋은 느낌으로 다가왔다.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기에 지금의 어린아이, 어디쯤 있음 직한 생기 많은 아이, 딸의 어릴 적 이미지와 아들의 성격, 말투, 봄을 기다리던 어린 나의 모습을 합한 어린이를 그림에 들여놓고 보니 봄 노랑, 연둣빛이 더욱 싱그럽게 생기가 도는 느낌이 들면서 후반부의 스토리까지 자연스럽게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그림책에서 편집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꿩을 따라가며 만나는 제주의 봄 들판, 그림에 드러난 그 모습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다. 할머니, 엄마, 아이로 이어지는 대화로 이야기를 이끌어가 볼까? 그림의 후반부에 그림을 그리면서 아이와 엄마의 대화체가 자연스럽게 떠올려지고 있었다. 그렇게 고사리밭에서 꿩과 아이가 만나고, 할머니의 설레는 봄이 엄마를 거쳐 아이에게 전달되는 다층적인 구조의 이야기가 되었다.

겨울 두 달 동안 그림을 그리고 글을 마무리하며 봄이 들기를 어느 때보다 기다리고 있었다. 제주도 봄 풍경과 색을 그려놓고 보니 같이 담을 수 없는 풀내음, 봄 향기를 전달할 방법을 고민하다 책과 함께 제주 고사리 선물 이벤트를 열게 되었다. 봄이 들면서부터 내내 책의 무대가 된 고사리밭으로 향했다, 행복한 노동이었고, 제주를 나누는 일, 봄이 내 몸 곳곳에 스며들어 오는 느낌이었다.


『봄이 들면』에는 내가 보아온, 몸으로 체득한 봄의 시간들이 있다. 책의 마지막 약속은 나에게 하는 약속이다. 이 모든 것을 간직할 수 있기를, 그 길에 힘을 보탤 수 있기를…. 나의 고향, 나의 터. 제주 담은 제주 이야기를 전달하는 작가로 살아가기를 다짐해 본다.



김영화 작가는 제주에서 태어나 배우고 자랐다. 『큰할망이 있었어』 『노랑의 이름』을 쓰고 그렸으며, 제주4·3을 기억하고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무등이왓에 부는 바람』으로 한국출판문화상과 대한민국그림책상을 받았다.


-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4년 7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 행복한아침독서 www.morningreadi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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