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하 옆 오래된 집
토머스 하딩 글 / 브리타 테큰트럽 그림 / 남은주 옮김 / 52쪽 / 19,000원 / 북뱅크
안네 프랑크는 세계사에서 가장 애달픈 인물 중 하나다. 그의 삶은 겨우 16년 만에 멈췄지만 그의 생은 80년 가까운 시간을 넘어 지금 우리에게까지 흘러오고 있다. 누구나 알고 있듯 그가 쓴 일기 덕분이다. 나치를 피해 숨어 사는 동안 안네는 자신의 몸과 마음과 생각을 ‘키티’라고 이름 붙인 일기장에 기록했고, 우리는 그의 일기를 펼쳐 보며 인류사의 끔찍한 비극을 더듬어 보게 된다.
그런데 여기, 일기 말고도 우리에게 안네의 삶을 들려줄 이가 또 있다. 안네가 ‘운하 옆 오래된 집’이라고 부르는 공간이 목소리의 주인공이다. 그러고 보니 집이야말로 일기 못지않은 증인이 되기에 충분하다. 집은 일기가 미처 담아내지 못한 안네 가족의 일상과 희로애락을 전지적 주택 시점으로 속속들이 지켜봤을 테니까.
그림책은 운하 바로 옆에 지어진 어느 집 대문을 클로즈업하며 시작된다. 그림작가 브리타 테큰트럽은 크고 길쭉한 창 안에 환하고 따뜻한 빛을 몽환적으로 채워놓았다. 속표지를 넘기면 1954년에 찍은 흑백사진이 페이지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그림책의 주인공인 ‘운하 옆 오래된 집’의 전신사진이다. 주인공 주변으로 그동안 집이 품어온 사람들과 풍경들이 다채롭게 펼쳐져 있다. 집은 나이가 아주 많다. 안네를 만날 무렵 집은 이미 300살이 넘은 노장이었다. 집은 세대가 바뀌고 역사가 새로 쓰이는 동안 보고 들은 바를 우리에게 조곤조곤 알려준다.
집은 안네 부친의 사무실로 사용되었다. 나치가 닥치는 대로 유대인을 잡아들이는 동안에는 안네 가족의 은신처가 되어 잠깐이나마 그들을 품어주었다. 모든 위험이 사라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보호해 주고 싶었겠지만 안네의 일기장만을 겨우 숨길 수 있었다.
집은 사람이 계획하고 만드는 공간이다. 사람은 집에 무엇을 담고 어떻게 남길지 결정하지만 집이 사람의 일에 관여할 수는 없다. 자신에게 운명처럼 주어진 ‘그저 지켜보기’와 ‘빠짐없이 새겨놓기’를 수행할 뿐. 운하 옆 오래된 집은 운이 좋았다. 안네의 일기장뿐만 아니라 자신의 일기장까지 들여다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게 되었으니까.
그림책의 마지막 페이지는 과거를 돌아보게 하는 박물관이자 미래를 교육하는 교육센터로 탈바꿈한 집의 모습을 화창한 톤으로 보여준다. 운하처럼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아 밤나무처럼 단단하게 세워놓은 ‘시간 기록자’로서의 위엄이 느껴진다.
최은영_꽃자리그림책상생학교 대표, 『그림책은 알고 있지』 저자
-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4년 8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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