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곁의 일하는 사람들을 그리며

by 행복한독서

우리 동네 청수마트

이작은 글·그림 / 48쪽 / 17,000원 / 이야기꽃



우연히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제1회 김은미 그림책상 공모전’ 안내 글을 봤어요.

“평범한 이웃의 삶에 그림의 빛을 비추다 일찍 세상 떠난 김은미 작가를 기리며, 고인이 그랬듯 작고 낮은 존재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나가는 작가에게 작지만 뜨거운 응원을 보내고자 ‘김은미 그림책상’을 제정, 공모합니다.”

이 글을 보는 순간 ‘청수마트’가 생각났어요.


“연중무휴 365일 세일”이라는 현수막을 걸고 장사하던 우리 동네 마트에요. 작은 마트지만 있어야 할 물건은 다 있고, 일하는 사람도 있어야 할 사람은 다 있는 마트지요. 또 제가 3년 동안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던 곳이기도 해요. 마트에서 저는 포스를 맡았어요. 계산하는 일이에요. 물건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날라야 하니까 팔뚝이 굵어져요. 꼼짝없이 서서 일해야 하니 다리도 아파요. 하지만 다리보다는 마음이 더 아플 때가 많아요.


마트에는 저 말고도 일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점장, 배송 과장, 정육, 생선, 대리, 채소 이모, 계산 이모, 식당 이모. 자기가 맡은 일이 그 사람 이름이 돼요. 작가한테 필명이 있듯이, 일하는 사람한테는 일명이라고 해야 할까요. 처음 일할 때는 그게 이상했어요. 사람이 물건이 된 것 같았어요. 또 이상한 건 이모라고 부르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이 저보고 계산 이모라고 부를 때는 좀 창피하기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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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에 당선되고 『우리 동네 청수마트』 작업을 하면서 그분들은 누구였을까? 나는 왜 이 작업을 하려 했을까? 생각했어요. 마트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측은하거나 부당하거나 힘들어서는 아니에요. 무엇보다 한 사람 한 사람, 매일 볼 수 있고, 목소리를 들었고,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었죠. 지금도 내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들이에요. 그림을 그리며 그분들을 기억하고 싶었어요. 당시에는 몰랐던 그분들을 마음에 되살려낼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같이 있을 때는 시큰둥하던 내게 그분들은 누구였을까 하고요. 다행히 저에게는 작업할 재료가 많이 있었어요. 오전 계산 이모가 매주 화요일마다 쉬는데, 그날은 제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했어요. 하루 종일 같이 있으면서 또 밥 먹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죠. 그때 나누었던 이야기들이 모여 청수마트 작업을 하게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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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게는 『오늘도 마트에 갑니다』라는 전작이 있어요. 여섯 살 동수가 주인공이에요. 그때는 연필로 그렸어요. 색은 최대한 자제했죠. 동수한테만 집중하고 싶었거든요. 『우리 동네 청수마트』는 아크릴로 색도 많이 썼어요. 많이 살았다는 건 사연이 많다는 거잖아요. 이 색, 저 색, 슬픈 색, 기쁜 색, 별별 색에 범벅되어 살아왔을 테니까요. 연필로 살살 그려서는 그분들의 삶을 다 드러낼 수 없을 것 같았어요. ‘질척하게 팍팍!’ 그렇게 마음먹고 작업을 했는데 책이 나오고 보니 아쉬움이 남아요. 좀더 팍팍 해야 했는데… 하고요. 그리고 책 앞과 뒤 면지에 사탕이 나오는데요. 고 김은미 그림책작가의 마지막 책 『이야기를 그려드립니다』에는 시장에서 파는 사탕이 나와요. 그 사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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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나오고 기뻐서 채소 이모에게 전화했어요. 점심밥으로 쭈꾸미 볶음밥을 먹으면서, 책 나왔다는 말을 하지 못했어요. 가져갔던 『우리 동네 청수마트』를 가방 속에 그대로 다시 가져왔어요. 채소 이모에게 잘못한 게 아닌가 하고 문득 깨달았어요. 혼날 것 같아서 자신이 없었어요. 정육 사장한테 연락했어요. 이러이러해서 책이 나왔다 하고 사연을 말했어요. 정육 사장은 책을 보더니 자신이 영화에라도 출연한 듯 신기해했어요. 나를 보고 고맙다며 삼겹살도 주었어요. 어쩜, 채소 이모도 좋아할지 몰라! 자신감이 생겼어요. 일주일 뒤 다시 채소 이모를 만나 책을 꺼냈어요. 채소 이모 표정을 보고 ‘휴~ 다행이다!’ 했어요. 채소 이모와 백합 칼국수를 먹고 돌아오는 길에 채소 이모가 “나 서울 돈암동 날라리 출신이잖아. 그래도 나 주산도 잘했고, 부기도 잘했어. 그리고…” 하며 젊었을 때 이야기를 해줬어요. 그때 이야기를 하면서 신나 했어요. 책 어느 부분이 채소 이모를 신나게 했을까요. 그리고 대리한테서도 전화가 왔어요. 사업에 실패하고 청수마트로 들어온 대리는 한참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었어요. 그때 생각을 하니 눈물이 나온다고 했어요. “정말 감동이에요.” 대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어요.


이 책을 또 들여다보며 내가 말하려던 것, 그리고 결국 말해진 것이 같은가, 다른가 하고 생각해요. 그저 이분들 모습이었어요. 사는 모습. 무슨 보람으로 사는지. 어떤 사정이 있는지 그런 거요. 그림책을 만들어가며 오히려 이분들이 모두 건강하게 제 몫을 살고 있다는 확신 같은 게 생겨났어요. 『우리 동네 청수마트』에서 어떤 모습이 그랬는지 다른 사람들도 조금 엿볼 수 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이작은_그림책작가, 『우리 동네 청수마트』 저자


-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5년 6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 행복한아침독서 www.morningreadi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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