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들려주는 그림책 이야기 7
아빠가 토라져요. 엄마가 토라져요.
할머니도, 누나도, 형도, 막내도요.
모두요.
토라지는 가족
이현민 글·그림 / 42쪽 / 13,500원 / 고래뱃속
나에게 그림 그리기는 한 대상을 진심으로 알게 되는 과정이다.
내가 가족에 관해 그려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꽤 놀란 적이 있었다. 이미 빤히 다 알고 있는, 그래서 그리기에는 너무 흔하고 뻔하며 민망한 존재들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갑자기 멍해지며 가족들 얼굴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집으로 가는 길도 기억나지 않았다. 자동차 내비게이션 화면 속, 무언가 안내를 따라야만 갈 수 있는 좌표처럼 막막하고 멀게만 느껴졌다. 과연 그들의 마음은 어떤 모습, 어떤 풍경일까 생각하며 그림 몇 점을 그렸었다. 운 좋게도 그런 그림들을 모태로 책을 만들 기회가 생겼다. 몇 가지 버전을 구상했지만 가장 단순하고 보편적인 것을 골랐다.
밥을 먹으려고 모인 가족이 토라진다. 느닷없다. 안으로부터 단단해진 가족들은 돌멩이처럼 굴러나가 홀로 시간을 보낸다. 하루 종일 그렇게 있던 가족들이 어느덧 강장동물처럼 비워지는 시간이 온다. 감정의 시간이 감각의 시간으로 옮겨지는 타이밍이다. 마음도 텅 비고 몸도 텅 비어서, 시간의 변화와 바깥의 소란스런 감각들이 그 내부로 고스란히 밀려드는 시간이다.
개가 천부적으로 가진 가장 큰 장점은 솔직함일 거다. 하루 종일 여기저기 가족들 주변을 배회하던 누렁이가 가장 먼저 자신의 감각에 반응한다. 그것을 막내가 본다. 개를 따라가는 막내를 형이 본다. 개와 막내와 형을 누나가 본다. … 개와 막내와 형과 누나와 할머니와 엄마가 가는 걸 아빠가 본다. 결국 모두 스르르 자리에서 풀려난다. 그 방향에 집이 있고, 그들이 약간은 쭈뼛쭈뼛 집으로 모여들자 다시 가족은 성립한다. 아직은 어색한 가족이 말이다. 그림책 『토라지는 가족』은 이런 이야기 혹은 그림들이다.
시작은 경쾌했다. 글이 완성되자 책의 스케일과 분량, 그리고 대략적인 스케치까지 곧 정해졌다. 그런데 선뜻 작업에 들어가기가 어려웠다. 여전히 생각이 분분했던 탓이다. 단순해져야 할 것 같았다. 거칠며 변덕이 심하고 성미 급한 초보에게 단순해지는 건 변수들을 제한하는 걸 의미한다.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다음과 같은 작업의 원칙을 세웠다.
‘그림이 격앙되지 않도록 다독일 것’ ‘평범한 종이에 물감과 붓으로만 그릴 것’ ‘기교를 부리지 말고 아는 것만 그릴 것’ ‘편집진과 잘 소통하고 늘 솔직할 것’ ‘그림책과 다른 일 사이에서 균형을 잡을 것’
작업은 늘 산만하고 거칠게 시작됐지만, 조금 지나면 붓이 차분해지는 순간이 왔다. 그러면 조금씩 구체적인 이미지들을 잡아나갈 수 있었다. 그림의 세부나 디테일은 철저하게 기억과 상상에만 의존해서 그렸다. 그렇게 두 점을 완성하고 나자 본격적으로 궤도에 진입할 수 있었다. 길고 느리게 도는….
마감일이 잡히고 나서야 뭔가 정리가 되기 시작했다. 빠진 부분을 그려 넣고, 거친 부분을 다듬었다. 그런데 그림이란 게 늘 그렇다. 어설프고 완성도가 낮은 것과 딱딱하고 과잉된 것은 정말 한순간에 결정 나버린다. 멈출 데서 멈추는 판단력은 그래서 중요하다. 하지만 갈 데까지 가보지 않으면 그 또한 확실히 알기가 어려워서, 지우고 그리는 일은 마지막까지 반복되었다. 그렇게 생긴 얇디얇은 층들은 그림의 이면에 얼룩이나 그림자 혹은 기억처럼 남는다. 가을이 겨울로 미끄러지려고 하자 공연히 더 바쁘고 어수선해졌다. 그래도 여유를 잃지 않고 집중하려 했다. 생각이 너무 많아지면 산으로 간다. 마지막 장은 그림과 텍스트 배치를 완전히 바꿨다가 인쇄 직전 그림 크기만 조금 줄여서 다시 원래대로 되돌렸다. 그런데 나는 그런 순간들이 오히려 재밌고 좋았다.
드디어 기계가 돌아가고, 인쇄된 그림들이 명랑하면서도 다소곳한 표정으로 차곡차곡 쌓였다. 모두 확인하고 일행과 거길 나올 때까지도 『토라지는 가족』은 아직 책은 아니었다. 며칠 뒤, 비로소 책이 된 『토라지는 가족』을 만날 수 있었다. 정말 놀라운 변신이었다. 지난 시간과 대화, 호흡, 잡다한 생각들이 한 덩어리로 간신히 묶여있는 듯했다. 나는 손으로 책의 무게를 슬쩍 가늠해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책장을 열었다. 수없이 많은 페이지가, 바람과 빛을 일으키며 넘겨지고 또 넘겨질 것만 같았다.
이현민 작가는 고양시 일산에 살며 작업하고 있습니다. 『토라지는 가족』은 쓰고 그린 첫 번째 그림책입니다.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0년 1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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