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들려주는 그림책 이야기 8
하얀 공주는 숲속에서 지내는 게 편해지고
더 좋아졌어. 울퉁불퉁 숲길도 잘 다니고
다람쥐처럼 높은 나무도 쉽게 탔지.
하얀 공주는 달라진 자기 모습이
마음에 들었어.
아주아주 멋진 하얀 공주
차영경 글·그림 / 56쪽 / 13,000원 / 위즈덤하우스
‘깊고 어두운 커다란 숲을 나의 조형으로 풀어보면 어떨까?’ ‘선과 면이 만나고 패턴으로 채워지는 숲은 어떤 느낌으로 표현될까?’ 자유롭게 드로잉 작업을 하던 어느 날 문득 떠오른 생각이었습니다.
나무를 좋아하고 산을 좋아해서 평소에도 산을 즐기고, 휴양림으로 여행도 곧잘 다녀서인지 초록 가득한 어느 여름날 드로잉 주제가 떠올랐어요. 숲속 이미지를 만들어보니 계속 작업하고 싶어서 기존의 이야기 몇 장면을 그려보았습니다. 짙고 어두운 숲과 함께 떠오른 이미지는 새하얗고 까만 머리의 백설공주가 숲으로 달려가는 모습이었어요. 그리고 포인트로 주고 싶은 빨간색은 새빨간 사과가 떠올랐고 이렇게 백설공주의 새로운 이야기는 시작되었습니다.
왕비에게 일방적으로 당하는 공주, 일곱 난쟁이의 도움만 받는 공주, 결국 왕자에 의해 목숨도 구하고 행복(했다고 하니)도 얻는 공주의 모습을 다르게 이야기하고 싶었고 그렇게 완성된 더미를 친한 그림책작가들과 편집자들에게 보여준 결과는…. “그림은 새롭고 좋은데 주제 의식이 아직 약해요”였습니다.
이후 모든 장면을 풀어두고 자료를 찾고 생각의 지점들을 정리해보았습니다. 첫 번째는 가장 확고했던 왕자의 등장 여부였습니다. 중세 유럽엔 지금보다 더 수많은 작은 나라들로 나뉘어있었고 그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나 영주의 자식들은 모두 공주, 왕자가 되었어요. 각 나라의 왕자들은 첫째만 나라를 물려받았고 나머지는 알아서 자신의 살길을 찾아야 했는데, 1순위는 다른 나라의 맏이나 외동 공주와 결혼하는 것이었지요. 「겨울왕국」 1편에도 열 명이 넘는 형들에게 밀려 서열이 꼴등인 왕자가 결혼하려고 계략을 꾸미는 모습이 나오지요. 여성과 남성의 성적 우위나 평등에 관한 논의를 떠나서라도 왕자는 빼는 것으로 확정!
두 번째는 일곱 난쟁이의 역할과 비중 그리고 성별과 생김새였습니다. 원작에서는 나름 결정적인 역할들이 있었지만 『아주아주 멋진 하얀 공주』에서는 공주가 스스로 자신을 지키고 삶을 살아갈 때 지지자로서 지켜봐주고 함께 지내는 절친(가족처럼 가깝지만 가족만큼 끈적하지 않고 적당히 객관적인 거리를 둘 수 있는)으로 하고 싶었어요. 난쟁이의 성별도 기존과 달리 성별이 짐작 가능할 정도로 섞어서 구성할지 고민했었는데 과장될 정도로 크기의 차이만 두는 것으로 정리했어요. 다양성의 시대가 시작된 지 이미 오래되기도 했고 함께 모여 살지만 각자 좋아하는 분야들을 알 수 있도록 색도 달리해 난쟁이들의 개성 있는 모습들로 보여주고 싶었어요.
이렇게 해서 숲에서 음악을 연주하고, 자유롭게 그림도 그리고, 숲의 식물을 가꾸고, 멋있는 옷을 만들어 입고, 어딜 가나 있을 것 같은 책벌레 친구도 있고, 뚝딱뚝딱 손재주 만점인 친구와 맛난 요리를 즐기는 친구로 자기만의 세계와 취향이 가득하고 그래서 따뜻하고 단단한 숲속 집 완성!
세 번째는 사건의 온상인 새 왕비입니다. 절대 권력과 능력의 소유자로 보이지만 실은 출발선부터 불리한 조건에서 시작한, 어찌 보면 안타까운 존재일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 시대 여자들의 능력 순위는 젊음과 미모, 출산의 유무가 좌우했다고 해요. 젊음에서 이미 순위가 밀리고 그나마 믿고 있던 미모까지 밀려버리니 낯선 곳에서 타국으로 시집온 왕비는 앞뒤 가릴 처지가 아니었던 거죠. 그리고 왕비는 결국 하얀 공주와 우리의 미래 모습, 나이 듦의 불변의 진리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 왕비도 새 삶을 찾고 건강히 살아가는 모습으로 끝을 장식하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정리하고 풀어낸 하얀 공주는 왕비의 계획을 재빨리 알아차리고 피해 도망가는, 처음 보는 숲속 낯선 집에 용감히 들어가는, 일곱 친구의 안전한 집안에서 집안일을 돕는 게 아니라 거친 숲에서 함께 일하는, 그렇게 숲에서 함께 잘 지내기 위해 과감히 자신을 변화시키는, 그래서 누구보다 숲속 생활에 잘 적응하며 지내는 하얀 공주로 만들어졌습니다. 물론 이렇게 씩씩하고 영리한 하얀 공주에게 왕비의 계략이 통할 리는 없었겠죠.
가늘고 명료한 선과 그 선들로 만들어진 익숙한 듯 낯선 조형들을 즐기며 만들었고, 그 조형들을 통해 재현 가능한 모든 사물을 낯설고 새롭게 볼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눈에 보이는 사물을 그 사물처럼 보이게 하는 멋진 재현의 대가들은 너무도 많으니까요.
공주라는 신분에서 숲에서 지내는 평범한 존재로 크게 변했지만 자신에 대한 단단한 믿음과 애정으로 상황을 받아들이고, 적응하며 즐기게 됨으로써 변화된 삶 자체를 당당히 껴안은 하얀 공주는 『아주아주 멋진 하얀 공주』로 이렇게 또 다른 숲인 우리에게로 찾아왔습니다.
차영경 작가는 홍익대학교에서 회화와 광고디자인을 공부하고, 2019 볼로냐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로 선정되었습니다. 마을 책방과 도서관에서 아이들과 그림책을 읽고 미술놀이를 합니다. 쓰고 그린 책으로 『네모』가 있으며 그림을 그린 책으로 『빗물 아파트』가 있습니다.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0년 2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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