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들려주는 그림책 이야기 9
예측하기 힘든 날씨같이
시시각각 변하는 선상에서
각자 자기의 속도로 나아가는
우리를 봅니다.
내일의 날씨는 맑을 거예요.
내일은 맑겠습니다
이명애 글·그림 / 64쪽 / 16,000원 / 문학동네
하교 후의 아이들이 운동장을 가득 메운다. 저마다의 이유로 내 눈앞의 풍경은 움직임으로 화려해졌다. 나무 밑 벤치에 앉아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던 내 손도 덩달아 바빠졌다. 그 당시 한참 그림에 대한 고민이 많았던 터라 다시 초심으로 돌아간다는 심정으로 매일 일정 시간을 정해서 크로키를 연습하던 때였다. 휙휙 지나가는 아이들에 반해 움직임이 거의 없지만 가장 많은 에너지를 내뿜으며 온 힘을 다 쓰는 한 아이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자기 몸의 일부분을 이용해 나머지 대부분의 몸을 들어 올리는 아이. 불과 채 일 분을 넘지 못하고 땅으로 내려왔다가 다시 또 매달렸다가 또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학교에서 수행평가라도 있는 걸까…. 떨어질 걸 알면서도 중력의 힘에 저항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등바등 매달려 있는 아이의 얼굴에서 순간 내가 보였다.
내가 매달리면 어떤 모습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다음 날도 같은 철봉엔 어른과 아이를 막론하고 각각의 서로 다른 이유로 매달리는 여러 사람을 보았고, 나도 가끔 매달리면서 틈틈이 드로잉을 해놓았다.
그림 고민 때문에 시작한 드로잉이라 내 나름대로 몇 가지 규칙이 있었다. 첫 번째는 매일 한 시간 정도 보이는 사람 그리기. 두 번째는 재료가 익숙해질 때쯤 다른 재료로 바꾸기. 세 번째 건식 재료와 습식 재료를 섞어 그리기. 같은 사람을 그리더라도 그날그날 컨디션에 따라 전혀 다른 선이 표현되기도 했다. 연필이 익숙해질 때쯤 색연필로 바꾸었고, 색연필이 손에 익을 때쯤엔 붓으로 바꾸며 그림을 그렸다. 어떤 날은 맘에 드는 인물이 그려지기도 했지만 어떤 날은 낯선 연필의 느낌과 씨름하기도 했다. 아무튼 그렇게 하기를 여러 날이 되자 수십 명의 인물이 그려졌고, 작업실에 돌아온 나는 그 그림들을 한 화면에 편집해 넣어보았다. 각기 다른 날 그려진 인물들이 한 화면에 들어가는 순간 가상의 공간이 생겼고, 뭔지 모를 이야기가 생겨난 걸 직감적으로 느꼈다.
하루하루 서로 다른 재료들로 그려진 인물들이 모여 한 공간을 지나가고, 다음 장면에 올 선을 대비한다. 그 선에 맞게 몸 형태와 템포를 조절하며 다음 장면으로 넘어간다. 내가 사는 커다란 공간은 하나지만, 서로 다른 날 태어난 사람들이 각기 다른 움직임으로 살아간다. 어쩌면 『내일은 맑겠습니다』의 주제이기도 하고, 평소 내가 사는 곳에 대한 생각이기도 하다. 살아있는 유기체들의 집합 같기도 한 동그란 지구는 유연하다. 그 동그란 지구를 양손을 잡고 쭉~ 늘리다 보니 긴 선이 생겼고 그 선은 갓 잡은 생선 마냥 팔딱팔딱 뛴다. 그 위를 아슬아슬하게 사람들이 살아내고 있다.
이번 그림책엔 특별한 화자가 없다. 굳이 있다면 기상 캐스터가 이야기를 이끌어간다고 할 수 있다. 내레이션과는 다르게 그림에선 작게 일곱 명이 릴레이로 바통을 넘기며 장면을 이끈다. 하지만 특별하게 눈에 띄진 않는다. 눈에 보이는 듯 보이지 않는 주인공들은 큰 흐름 속에 보조 역할을 하며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오늘은 평범한 일직선의 삶이었다면, 어떤 날은 버라이어티한 정글짐이 될 수도 있고, 어떤 날은 습기 가득한 물속에 빠진 듯 숨차 오르는 날일 수도 있다. 무릎을 꿇고 기어 다녀야 할 때도 있고, 남보다 조금 빠른 지하철을 타고 좀 편히 이동할 때도 있다. 내일 나에게 어떤 날이 다가올지는 일기예보만큼이나 예측하기 힘들다.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조금이라도 유연한 몸을 만들어 다가올 다음 장면의 선을 최대한 상처 없이 잘 넘어가는 것이다.
그림의 인물들이 조각으로 먼저 만들어졌고, 낱장의 그림이 수십 장 쌓이면서 이걸 어떻게 책으로 이어야 할지 고민했다. 『플라스틱 섬』과 『10초』를 만들 때도 그랬지만, 『내일은 맑겠습니다』도 그림이 먼저 나왔고 나중에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노란 선이 주인공이었고 사람들의 움직임이 역동적으로 보였으면 했고, 글은 담담하고 중간중간 이중적 의미가 묘하게 그림과 맞닿으며 다른 이야기를 펼쳤으면 했다. 지금은 이렇게 쉽게 말할 수 있지만 그림이 거의 다 된 상태에서 지금의 꼴로 만들어지기까지 2년이란 시간을 할애했다. 처음엔 글 없이 진행했고, 의성어와 의태어로만 글이 쓰인 상태로 편집이 되기도 했다. 수백 장 그려진 파편의 그림들을 하나로 묶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았고, 편집을 거듭할수록 미궁으로 빠지기 일쑤였다.
몇 개월이 아무것도 못한 채 흘러갔다. 머릿속이 텅 비워진 어느 늦은 밤, 작업실에서 집에 가려고 나섰다. 전날 일기예보에선 비가 온다는 소식이 없었지만 보란 듯이 쭉쭉 내렸다. 꼭 내가 그린 노란 선 같이 자기 맘대로였다. 그날 내가 느낀 날씨와 하는 작업이 묘하게 닮아있다고 느꼈고, 그렇게 해서 지금의 글이 붙여지게 되었다.
이 그림책을 일 분도 안 돼서 후루룩 보는 독자도 있겠지만, 만든 사람 입장에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려진 시간만큼이나 오래오래 들여다봤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리고 현재 나는 어느 선을 지나는지 생각해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이렇게 쓴 김에 내가 먼저 해본다면…. 다음 책을 준비하는 나는 요즘 책의 중후반에 등장하는 도서관 어디쯤에서 그동안 밀린 책과 소재들을 찾으며 지낸다. 아마도 네 번째 책 주인공은 『내일은 맑겠습니다』에 등장했던 수백 명 중의 한 명일 듯싶다.
이명애 작가는 『플라스틱 섬』 『10초』를 쓰고 그렸습니다. 『플라스틱 섬』 으로 2015년 볼로냐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에 선정되었고 나미콩쿠르 은상과 브라티슬라바비엔날레 황금패상을 받았습니다. 『코딱지 할아버지』 『우리 동네 택견 사부』 『물개 할망』 등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내일은 맑겠습니다』로 2017년 나미콩쿠르 은상과 볼로냐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에 선정되었습니다.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0년 3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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