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부터 ‘필사’가 유행한다는 얘기를 듣고 두 귀를 의심했다. 컴퓨터는 물론이고 스마트폰으로 글을 쓰는 데 익숙한 이 시대에 책이나 문장을 손으로 직접 베껴 쓰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뭐든지 빠른 것을 미덕으로 삼는 디지털 시대가 힘겨워서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 써보는 그 활동이 그리워졌다는 의미일까.
바야흐로 ‘필사 유행’이라 할 만큼 서점에서 필사 관련 책을 찾아보는 건 어렵지 않다. 그런데 왼쪽에 베껴 쓸 문장을, 오른쪽에 빈칸을 담아 편집한 필사 노트가 다수다.
『필사의 기초』 『따라 쓰기만 해도 글이 좋아진다』는 그런 궁금증을 품다가 발견한 책들이다. 필사를 해보려는 이들, 필사를 통해 내 글을 단단히 써보려는 이들에게 친절한 안내서 역할을 한다. 두 책의 저자 모두 ‘필사 선배’라 불러도 될 만큼 오랜 시간 필사를 직접 경험하고 있다는 데서 닮은 점도 보인다.
가족과 떨어져 직장 생활을 하던 이십 대 후반의 남자는 홀로 있는 시간에 필사하는 습관을 들인다. 라디오를 켜놓고 책 속에서 좋은 문장을 발견하는 대로 아무 노트에다 필사하는 일은 돈 들이지 않고 집중할 수 있는 좋은 취미가 된다.
『필사의 기초』(조경국 지음 / 유유)는 10년 넘게 ‘필사 인생’을 살고 있는 조경국 작가의 필사 이야기다. 출구가 보이지 않았던 캄캄한 시절부터 고향에서 헌책방을 운영하며 몸과 마음에 여유가 생긴 지금까지 그의 인생에서 독서와 필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활동을 넘어 아주 중요한 존재로 자리하게 됐다. 마치 가족처럼 말이다. 조 작가는 이 책에서 인생의 친구나 다름없는 필사와의 인연을 비롯하여 자신이 체득한 필사 방법, 작가들의 책에서 발견한 필사 관련 문장들, 역사 속 필사 이야기 등을 아주 살뜰하게 담아냈다.
무엇보다 필사에 대한 그만의 정의가 눈에 들어온다. 조 작가는 필사를 “책과 펜과 노트를 동무 삼아 ‘삶을 정제’하는 행위”라며 “베껴 쓰기를 하고 있는 동안엔 나의 주체할 수 없는 가벼움에 잠시라도 납추를 얹는 느낌”이라고 고백했다. 그의 말을 통해 손글씨로 꾹꾹 눌러 베껴 쓰는 일의 의미를 곱씹어본다. 베껴 쓰기는 결국 훨훨 날아다니는 우리들의 생각을, 흔들리는 마음을 잠시나마 가라앉히는 일종의 명상이 아닐까 싶다.
이 명상 활동은 생각보다 많은 걸 가져다준다. 조 작가가 말하는 필사는 나만의 시간과 차분한 마음을 갖게 해주고, 기억을 연장하게 해주며, 돈이 들지 않는다. 경쟁할 필요가 없는 활동이다.
중간중간 작가가 소개하는 필사 관련 명문장을 읽는 재미도 남다르다.
“대체로 글이란 눈으로 보고 입으로 읽는 것보다 손으로 직접 한 번 써보는 것이 백 배 낫다.” (37쪽) 이덕무는 『사소절』에서 힘들여 한 번 써보는 것이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단단하게 만들어줄 수 있음을 강조한다. “서법은 사람마다 전수받을 수 있지만, 정신과 흥취는 사람마다 자신이 스스로 이룩하는 것이다.” (66쪽) 추사 김정희의 『완당전집』에 나오는 문장은 필사에서 중요한 건 글씨의 기술이 아닌 정신과 태도임을 일러준다. 이태준, 오에 겐자부로, 스티븐 킹 등 책에 담긴 명작가들의 주옥같은 문장은 우리들의 필사 활동에 든든한 벗이 될 것이다. 반듯한 손글씨로 쓴 조 작가의 필사 기록 그리고 필통, 만년필, 볼펜, 커터 등 작가만의 필사 도구를 만나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조 작가는 필사를 단순한 베껴 쓰기 활동이 아니라고 말한다. 지금의 베껴 쓰는 활동은 결국 자기 글을 쓰기 위한 디딤돌이라는 것. ‘베껴 쓰기 너머’ 어딘가에 있을 나만의 글쓰기를 상상하며 오늘 잠시 잠깐이라도 필사를 해보면 좋겠다.
『따라 쓰기만 해도 글이 좋아진다』(김선영 지음 / 좋은습관연구소)의 김선영 작가 역시 자기 글을 쓰려는 이에게 ‘필사’를 권한다. 잘 쓰려면 많이 읽고 많이 쓰는 것이 기본인데, 둘을 모두 충족하는 행위가 필사라는 것이다.
4년 동안 매일 필사를 한다는 그는 이 책에서 글쓰기에 도움이 되는 서른 개 필사 문장을 뽑아 소개했다. 필사할 문장과 빈칸만 있는 여느 필사 도서와 달리 서른 개의 문장 옆에 글쓰기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에세이로 담겼다. 신영복, 박완서, 최은영 작가의 문장이 김 작가의 해설과 만나 우리를 글쓰기의 세계로 인도한다. 책은 글을 꾸준히 쓰는 데 필요한 습관, 훌륭한 문장에 담긴 표현법, 글쓰기의 참된 의미 등을 짚어본 훌륭한 글쓰기 안내서이기도 하다.
작가는 『걷기예찬』을 통해 글쓰기에서 산책이 필요한 이유를, 『책만 보는 바보』 속 유득공의 이야기를 통해 입으로 책을 즐기는 것의 의미를 발견한다. 필사한 문장에 대한 작가만의 생각을 읽다 보면 ‘베껴 쓰기’ 이후의 ‘나만의 글쓰기’가 이렇게 구현되는 거구나 싶다.
비교적 최근 나온 책들 속에서 필사 문장을 뽑았다는 점도 새롭다. 김 작가는 필사할 책을 따로 정해놓기보다 지금 읽고 있는 책에서 고르는 편이라고 말한다. 기대하고 읽었는데 막상 필사할 구절을 찾지 못하는 예도 있고, 반대로 중고서점에서 헐값에 데려온 책에서 영감의 우물을 발견하기도 한다고. 필사는 이렇게 ‘발견’의 기쁨을 주는 독서활동이기도 하다.
작가의 정신을 닮고 싶어서, 지적 탐구의 기록을 위해, 글씨체를 교정하려고…. 그 어떤 목적의 필사여도 관계없다. 김 작가는 “내 머리로 들어온 작가의 생각이 손끝으로 나가는 동안, 그게 무엇이든 흔적을 남긴다”고 말한다. 작가가 되려는 이에게 필사가 왜 필요한 활동인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제 두 선배의 안내로 필사를 시작해 보자. 그런데 시간, 공간, 도구가 없다고? 이런 말을 하는 이들을 위해 『필사의 기초』에 나오는 한 문장을 옮겨본다.
“자투리 시간에 책과 노트를 펼 수 있는 작은 공간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김청연_작가, 『왜요, 그 말이 어때서요?』 저자
- 이 콘텐츠는 <동네책방동네도서관> 2025년 6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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