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디아 브란코비치 글·그림 / 장미란 옮김 / 44쪽 / 15,000원 / 책읽는곰
어렸을 때, 밤길을 걷다가 불쑥 맞닥뜨린 어두운 그림자에 화들짝 놀란 기억이 있다. 무섭게 느껴졌던 그림자가, 내 그림자라는 걸 확인하고는 금세 안도했지만 말이다. 그림책 『감정 서커스』의 주인공 소녀 리카도 갑자기 찾아온 자신의 그림자에 당황한다. 사실 그림자는 늘 함께했지만, 다들 그렇듯 리카 역시 그동안 그림자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그림자가 이상하다. 손을 살짝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거나, 들썩들썩 춤을 추는 등 제멋대로 행동하기 시작한다. 그런 그림자를 리카는 못 본 척 무시하지만, 리카가 그림자를 외면하면 할수록, 그림자는 점점 더 짓궂게 군다.
리카가 큰 소리로 말하지만, 그림자는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리카는 제 방으로 뛰어 올라가 커튼을 여미고 불도 모두 끈 채, 그림자를 피해 몸을 웅크린다. 그러자 그림자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버린다.
정신분석학자 카를 구스타프 융의 그림자 이론에 따르면, 누구나 내면에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무의식 속에 억압된 자아의 또 다른 모습인 그림자를 대개는 무시하고 회피하지만, 그림자를 인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이 되기 때문이다.
어느 날 리카의 그림자는 그림자들로 가득 찬 감정 서커스 천막으로 리카를 데리고 간다. 천막 안의 그림자들은 리카가 숨기고 싶어 하는 비밀을 모두 알고 있는 듯, 몸을 비틀며 빙그르르 돈다. 리카는 두려움에 두 눈을 꼭 감는다. 그 순간 리카 곁에 다가온 한 그림자. 그것은 바로 리카 자신의 그림자였다. 리카가 비로소 마주한 그림자는, 리카의 생각과는 다르게 무섭지 않았다. 마침내 리카는 자신의 그림자를 직면하고, 그림자를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감정 서커스』는 리카가 억압한 감정의 결을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은 그림자로 잘 표현해 냈다. 그림 전체에서 느껴지는 단색의 색감은 그림자와 빛이 우리의 삶에서 동전의 양면처럼 춤을 추며 존재한다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전해주는 듯하다. 내 안의 그림자가 말하는 이야기를 한번 고요히 들어보라고 권유하는 것만 같다. 그 귀 기울임이 마음이 어두워질 때 스스로 빛을 밝혀주는 길이 되어줄 거라고 나지막이 이야기한다.
윤정선_작가, 그림책 평론가, 『루아의 시간』 저자
-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5년 6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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