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삶을 지탱하는 기억의 힘

by 행복한독서

기억은행

최은영 글 / 도아마 그림 / 48쪽 / 16,800원 / 나무의말



‘기억을 은행에 저금한다고?’ ‘기억을 보관해 주는 은행이 있다니’ 참신한 발상에 이끌려 책장을 열면 모두가 잠든 고요한 밤의 세계가 펼쳐진다. 사람들은 오늘 잘못한 일, 실수한 일, 부끄러운 일, 속상한 일을 생각하느라 쉽게 잠들지 못한다. 이불 속에서 한참을 뒤척이다 겨우 잠든 그때, ‘탁!’ 하는 소리와 함께 건물 안의 노란빛 전등이 환히 켜지고, 문 앞에는 ‘OPEN’ 팻말이 세워진다. 기억은행의 영업이 시작되자 은행원들은 오늘 쌓인 기억들을 정리해서 금고에 차곡차곡 보관한다. 이들에게 중요하지 않은 기억은 없다.


인형, 편지, 공, 늘어진 카세트테이프, 털장갑, 시든 꽃, 스크랩북처럼 사람들이 저금한 기억은 모두 다르다. 밤이 한층 깊어지고 사람들이 꿈을 꾸기 시작하면, 은행원들은 기억이 담긴 상자를 들고 밤길을 나선다. 좌절하고 낙담한 이들의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서다.


잘하는 게 없는 자신을 한심하게 여기는 이는 슬픔에 잠긴 채 웅크리고 앉아 있다. 면접에서 스무 번째 떨어진 청년은 자신을 커피조차 마실 자격이 없는 낙오자라며 자책한다. 오지 않는 손님을 기다리다 지친 책방 주인은 책 미로 사이에서 길을 잃었다. 이들의 꿈속으로 들어간 은행원들은 잊고 지낸 따뜻한 기억을 심어준다. 아주 오래전의 일이지만, 언제나 그 사람을 지켜주고 있던 기억을 말이다.


오래된 장난감 하나, 빛바랜 사진 한 장에도 저마다의 사연이 숨어있다. 그 이야기는 추억이 되어 때로는 우리의 지친 마음을 다독이고, 다시 일어설 힘이 되어주곤 한다. 시간이 흘러도 선명한 기억이 있는가 하면, 어느샌가 희미해져 손에 잡히지 않는 기억도 있다. 어떤 기억은 잊힌 듯하지만 어느 순간 불쑥 되살아난다. 분명한 건 기억이란 단지 머릿속에 저장된 장면이 아니라, 한 사람이 걸어온 길이자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되어준다는 것이다.

그림3-기억은행_본문.png

이 책의 끝자락에 이르러 우리는 비로소 깨닫는다. 추억으로 저장된 기억이 인생의 힘든 순간을 극복하게 하고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워준다는 사실을. 그러니 자주 기억은행에 들러 보물 같은 추억을 저금해 두어야 한다. 금고를 거미줄로 가득 채운 이들에게는 기억은행원이 해줄 수 있는 게 없으니까.


이처럼 『기억은행』은 모두 잊었다고 생각한 마음속 깊은 곳의 이야기를 조용히 불러내어 ‘기억 자산’을 되살려 놓는다. 한밤중의 푸른 판타지 공간이 배경인 이 책은 신비로운 분위기를 내뿜으면서도 누구나 공감할 만한 이야기를 담고 있기에 호소력이 짙다.


누구나 삶의 장면에서 좌절하고 자신이 부끄러워져 숨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수록 우리가 다시 꺼내보아야 하는 건 실패가 아닌, 따뜻한 기억이 아닐까.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나의 기억 금고에는 어떤 추억이 들어있는지 열어보고 싶어진다.


김은아_그림책 칼럼니스트, 『who am I : 그림책 상담소』 저자


-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5년 6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 행복한아침독서 www.morningreading.org

keyword
작가의 이전글가만히 세상을 지탱하는 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