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선, 해외 그림책작가 - 베아트리체 알레마냐
베아트리체 알레먀나가 영향을 받은 책으로 자주 언급하는 책이 있어요. 바로 메리 리스태스 글, 빅토리아 체스 그림의 『괴물 밀리센트 Millicent the Monster』(1968)입니다. 이 책의 주인공 밀리센트는 어느 날, 공손한 말을 하는 게 지겨워 괴물이 되기로 작정한 빨간 더벅머리 소녀예요. 괴물이 된 밀리센트가 한 일은 어린 남동생을 잡아먹겠다고 위협하고, 높은 나무 위에 올라가 길 가는 소년에게 나무에 매달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친구 샐리를 직접 만나 온몸을 보라색으로 바꿔버리겠다고 협박하는 일이지요. ‘아이 안의 괴물’을 다룬 이 이야기는 알레마냐에게 ‘이상하고, 좀더 어두운 곳으로’ 들어가도록 용기를 북돋워 준 결정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어요.
『페퍼와 나』(비룡소, 2024)는 알레마냐식 미시서사의 특징이 집약된 작품입니다. 이야기의 화자는 위의 밀리센트처럼 붉은 더벅머리를 한 소녀예요. 이야기는 소녀와 무릎에 난 딱지 ‘페퍼’ 사이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딱지는 상처의 흔적이자 고통의 잔존물이며, 동시에 이야기를 가능케 하는 감정적 매개이죠. 딱지가 떨어지고 사라지는 과정은 이별과 상실, 회복이라는 정서적 궤적과 같이합니다. 이제 다시 상처가 나고 딱지가 생겨도 더는 처음처럼 두렵지 않을 것이며, 언젠가는 무덤덤하게 받아들이게 되리라는 내적 인식이 이 성장 서사의 핵심을 이룹니다.
이처럼 알레마냐는 일상의 사소한 지점에서 감정과 존재의 핵심을 길어 올립니다. 『페퍼와 나』의 딱지는 단순한 신체적 상처가 아니라 상실과 이별, 회복이라는 일련의 정서적 흐름을 내포하는 존재론적 상징입니다. 이는 『숲에서 보낸 마법 같은 하루』(미디어창비, 2017)에서 ‘지루함’과 ‘외로움’ 같은 부정적 감정이 자연과의 교감과 내면의 성찰로 전환되는 방식이나, 『절대 절대로!』(책빛, 2022)에서 학교를 거부하는 아이의 저항이 유쾌하면서도 심리적으로 설득력 있게 마무리되는 방식과도 맥락을 같이합니다.
알레마냐는 어린이문학의 전통적 역할인 도덕적 교훈이나 위로의 전달을 유보하고, 오히려 감정의 불안정성과 존재의 불완전성에 솔직하게 다가섭니다. 그녀의 작품 속 인물들은 미숙하고, 결핍되어 있으며, 때로는 자기중심적이기까지 하지요. 그러나 알레마냐는 그러한 ‘불완전함’을 숨기거나 비판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인간 존재의 보편적 조건이며, 성장이라는 역동적 과정의 일부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시선은 인간 발달에서 정서적 측면을 중심에 두는 현대 그림책의 흐름과도 깊이 맞닿아 있으며, 어린이 독자뿐 아니라 어른 독자에게도 정동적 반향을 일으킵니다. 알레마냐의 미시서사는 작은 상처와 그 흔적들을 통해 삶의 서사를 직조하며, 이를 통해 독자들은 각자의 ‘페퍼’를 돌아보게 됩니다.
『아듀, 백설 공주』(한솔수북, 2024)는 익숙한 동화의 틀을 빌리되, 그 내부를 전면 해체하고 전복하는 놀라운 시도입니다. 이 작업은 애초에 세상에 내놓을 생각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었어요. 갖지 못한 것을 파괴하고 싶은 비이성적 충동, 불안하고 어두운 자아의 뒷면을 들여다보려는 작가의 내밀한 탐색이었지요. 그런데 이 위험한 정직성을 알아본 한 통찰력 있는 편집자의 설득으로 마침내 한 권의 책으로 세상에 나오게 된 거예요.
이 책은 단순히 고전 동화를 색다르게 변주한 수준을 넘어서, 동화 장르의 서사 구조와 문법 자체를 해체하고 전복합니다. 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화자의 자리를 차지하는 인물이 백설공주가 아닌, 늘 ‘악역’으로만 소비되어 온 계모, 여왕이라는 점입니다. 알레마냐는 이 인물을 단순한 악녀의 틀에 가두지 않아요. 질투와 상실, 외로움의 그림자 속에서 자멸의 늪으로 점점 깊이 빠지게 되는 복합적인 존재로 그려냅니다. 이 여왕은 악의 화신이라기보다는 욕망의 균열 속에 갇힌 불완전한 인간입니다. 이처럼 계모의 내면을 정면으로 응시하게 하는 서사 구조는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떠올리게 합니다. 독자는 어느새 그녀를 비난하거나 외면하는 대신, 공포와 연민 사이에서 요동치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겪게 되지요. 결국 그녀는 스스로를 파괴함으로써 질투의 대상을 시야에서 지워냅니다. 그 절정의 순간은 단순한 응징이 아니라, 자기 인식과 붕괴가 동시에 밀려드는 깊은 심리극의 결말처럼 다가옵니다.
형식적으로도 이 책은 매우 독특합니다. 간결한 텍스트가 먼저 한 장을 가득 차지한 뒤, 한동안 글 없는 이미지 시퀀스가 이어지는 구조인데요. 이는 무성영화의 ‘인터타이틀(intertitle)’을 연상시킵니다. 글로 감정의 농도를 먼저 응축해 두고, 이어지는 그림 장면을 통해 그 감정의 흐름과 파동을 시각적으로 풀어내는 방식이지요. 알레마냐는 이 침묵의 이미지들에 고밀도의 감정과 내면의 흔들림을 담아냅니다. 말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더 깊은 진실을 전하는 것이지요.
『아듀, 백설 공주』는 단순한 동화 재창조를 넘어, 이야기라는 형식의 경계 자체를 시험합니다. 무엇보다 이 책이 품고 있는 내면의 깊이와 형식적 실험은, 그림책이라는 매체가 감당할 수 있는 감정의 밀도를 새삼 실감하게 하지요. 잔인할 정도로 강렬한 이 책은, 동화의 끝에서 시작되는 어른의 비극을 섬세하게 직시합니다.
김난령_번역가, 그림책 연구가
-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5년 6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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