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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철과 함께 들이받기

한국 그림책작가의 세계 - 박연철

by 행복한독서

박연철은 참 엉뚱하고 기발한 작가다. 대부분의 그림책작가들처럼 그림을 전공한 것도, 극소수 작가들처럼 문학을 전공한 것도 아니다. 그의 전공은 치기공학이다. 그런데 그림에 ‘피가 끓었다’고 한다. 우선 학습지 그림부터 시작했는데 ‘그림책계에서 안 받아주더라’고 한다. 역시 피가 끓던 차에, 그래도 일단 나는 세계적 작가가 될 터이니 영어를 잘해야 한다 싶어서 필리핀으로 떠나 고3 시절 이상으로 영어에 몰두했다. 그러고 돌아온 뒤 글·그림을 같이하는 외국 작가들도 부럽던 차에, 그림이 부족하다면 글로 커버하겠다는 생각에 여러 모임에서 글공부에도 몰두했다. 그러다 좌절할 무렵 『어처구니 이야기』가 공모전에 당선됐고, 이에 용기 내어 영국 킹스턴 대학의 일러스트 온라인 과정을 수료했고, 그 결과물인 『망태 할아버지가 온다』가 주목을 받게 됐다. 얼마 뒤에는 『떼루떼루』로 볼로냐 라가치상도 받았다. 사는 이유가 생긴 듯했고,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고 그는 실토한다.

그림7-떼루떼루.png ⓒ시공주니어(『떼루떼루』)

첫 독자 강연을 그는 잊을 수 없다고 말한다. 어처구니에 대해 산더미처럼 자료를 만들고 여섯 시간 운전해서 부산 행사장에 닿아 보니, 넓은 운동장 자그만 천막 하나에 대여섯 살짜리 아이 다섯이 달랑 앉아 있었다는 것이다. 그중 셋은 곧 잠이 들었고, 두 아이와 함께 그는 찰흙 놀이를 했다.

“그 다섯 명과의 시간이 지금까지 나를 그림책 하게 만들었어요. 헤어질 때가 되자 한 아이가 가지 말라며 내 다리를 끌어안더라고요.”


박연철의 청중 흡인력은 나도 익히 경험한 바 있다. 어른 대상의 강연이었는데 따라온 아이 둘이 맨 앞자리에 앉아 망태 할아버지 이야기에 입을 헤 벌린 채 놀라 자빠지겠다는 얼굴로 눈을 떼지 못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보고타국제도서전에서는 콜롬비아 청중들도 흥미진진하다는 표정이었다. 실연의 충격에 정신을 잃고 쓰러진 와중에 외계인 같은 형체와 만난 게 『안녕! 외계인』의 씨앗이었다는 고백은 나조차도 잠깐 믿을 정도였으니까. 그러니 『모르는 게 없던 척척박사 후안에게 닥친 끝없는 시련과 고난에 대하여』의 작가 소개를 읽을 때는 정신을 단단히 붙잡고 있어야 함을 알려드린다.


그는 『지구를 지켜라』로 독자를 관객으로 만드는 작업에 발을 들였다. ‘그림.책.몸짓’ 동아리에서 그림책을 테이블 인형극으로 만드는 워크숍에 참여한 것이다. 인형을 제작하고 무대를 꾸미는 일은 좋았지만 사람들 앞에서 연기를 한다는 건 혼이 쏙 빠지도록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매력에 빠져들었고, 이제 인형극은 그림책과 비슷한 비중으로 그의 활동 무대가 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인형극 첫 무대가 그림책 첫 강연처럼 카오스의 현장이었다는 점이다. 이번에는 500명의 입학생, 재학생, 교사, 학부모 앞이었다.

“제가 뭐 무대 경험이 있기를 해요, 조명 음향에 대해서 알기를 해요. 엉망진창이었는데, 그 학교에서 아직도 해마다 저를 불러주세요.”

그림7-지구를 지켜라.png ⓒ시공주니어(『지구를 지켜라』)

내친김에 인형극 세계로 더 깊이 들어간 그는 춘천 아마추어 인형극 경연에서 최우수상을 받았고, 춘천 인형극제에 특별 초청되기도 했다. 그 뒤 치열한 나무 공부, 염색, 바느질 등을 거쳐 모든 소품들을 직접 만들고 그렇게 그림책도 만든다. 긴 팬데믹의 수렁에서 벗어날 즈음 보았던 그의 공연 「드라큘라와 음악선생님」은 정신이 번쩍 들면서 흥이 폭발하는 자리였다. 신발로 만든 캐릭터들은 내게는 어린 시절 보았던 「세서미 스트리트」 이후 최고의 인형이었다. 어떻게 이런 걸 만들지? 그 공연을 본 이수지도 단언했다. “박연철은 천재예요!” 「드라큘라와 음악선생님」은 이제 ‘슈라큘라’라는 제목의 그림책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지금까지 삶의 여정만 이렇게 간단히 훑어도 박연철이 어떤 작가인지, 어떤 성향의 인물인지가 선명히 드러난다. 그는 덤비고 들이박는 사람이다. 결핍이 있으면 채우려 덤비고, 야망이 있으면 이루려 덤빈다. 그러나 ‘들이박다’의 사전적 의미처럼 ‘속으로 깊이 들어가도록’ 들이박는다. 수박 겉핥기는 싫다. 남 흉내도 싫다. 시장 요구에 굴복하기도 싫다. 자신의 의도를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 그는 맹렬하게 파고들어 간다. 국어사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샅샅이 읽고, 숲으로 들어가 나무를 공부하고, 매주 왕복 6시간씩 들여 마리오네트를 배우러 다니고, 20분 공연을 위해 4시간 몸을 단련하는 인형극 수련을 받는다. 고3 시절처럼.


50대 중반이 되어서도 여전히 고3으로 사니, 그는 그래서 청소년처럼 ‘들이받’는 데 일가견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전통 가족 개념을 들이받고, 엄격한 양육 방식을 들이받고, 신줏단지(효, 충, 신, 의, 예 같은) 덕목들을 들이받는다. 그러나 무작정 덤비고 들이받는 건 싸움꾼이지 예술가가 아니다. 그에게는 매번 자신을 새롭게 뛰어넘기, 나와 독자(관객)의 즐거움 극대화하기, 자연의 결에 순응하기, 죽은 듯한 사물에 생명력 불어넣기, 판타지 일깨우기 같은 작정이 있다. 무엇보다도 독자와의 첫 만남 때 보았던, 자신의 다리를 붙들고 매달리던 아이의 시선이 그를 붙들고 있다. 놀이의 기쁨을 맛본 아이의 간절한 눈빛이. 그는 그래서 낮은 곳의 작은 시선을 끌어올린다. 그 끝에서 탄탄한 질서 안의 발랄한 좌충우돌 놀이판을 창조해 낸다. 그 기발한 놀이판을, 눈 반짝이는 아이들이 얼마나 즐기는지 직접 보아야 한다.


그의 작정은 아마도 ‘슈라큘라’에서 집대성되지 않을까, 나는 기대한다. 신발. 밑으로는 흙과 돌과 물을 막아야 하고, 위로는 냄새나는 발의 짓누름을 받아내야 하는 가장 낮은 곳의 물건. 그런 신발에게 얼굴이 생기고 입이 생겨서 표정이 만들어지고 말이 나온다. 그들은 어떤 이야기를 풀어놓을까. 이야기를 듣기도 전에 내게는 작정부터 생긴다. 뭐가 됐든, 나도 신발들과 함께 들이받는다!


김서정_작가, 평론가, 『판타지 동화를 읽습니다』 저자


-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5년 6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 행복한아침독서 www.morningreadi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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