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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과 주관의 교차를 보여주는, 가장자리

by 행복한독서

가장자리

신순재 글 / 이영채 그림 / 40쪽 / 17,000원 / 위즈덤하우스



한적한 어촌으로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사람이 없는 바닷가에서 파도 소리에 귀 기울이고, 도시에서는 만날 수 없던 새들을 만났으며 밤에는 하늘에 뜬 별을 보았다. 사람 많은 도심과 대비되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이런 곳에서 한 달 살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신순재 작가가 글을 쓰고 이영채 화가가 그림을 그린 『가장자리』는 바로 이런 바닷가 마을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가장자리’는 중심을 기준으로 주변을 뜻하는 단어니, 우리나라 지도를 떠올려보면 바닷가는 그곳이 어디든 우리나라의 가장자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의 서사는 비교적 단순하여, 주인공 어린이가 가족과 바닷가 마을로 이사 오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어린이가 미리 가본 학교는 여름방학이라서 초록이 가득한 풍경 사이로 텅 빈 운동장만 보인다. 아이는 마을을 혼자 탐험하며 길가에 핀 꽃을 들여다보고 솔밭을 달리며, 바다에 두 발을 담그기도 한다. 어른으로는 한 달 살기를 하고 싶은 곳이지만 어린이의 눈으로는 낯설고 심심한 곳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 책은 이런 줄거리 요약보다 중요한 화두를 제목으로 제시한다. 표지에 쓰인 제목 ‘가장자리’를 보니 중간에 줄이 하나 그어져 있다. ‘가장 자리’, 이런 모양으로 중간에 어휘 넣을 자리를 마련해 놓았다.

‘가장자리’라는 단어는 사물의 바깥쪽 경계나 주변을 말하지만 ‘가장 자리’라고 쓰면 ‘가장’은 어떤 대상이 다른 대상들보다 정도가 높거나 센, 최상급을 뜻하는 부사가 된다. 이때 ‘가장’의 뒤에 놓이는 어휘는 이 책에서 꽃을 보며 ‘가장 예쁜 자리’라고 표현한 것처럼 주관적인 느낌이 되기도 한다.

심심하다, 예쁘다, 시원하다, 멀다 등 이 이야기에서 사용된 어휘들은 주관적이거나 상대적이다.


제목으로 쓰인 ‘가장자리’의 두 가지 의미를 소설이나 동화의 시점으로도 풀어볼 수 있다. 흔히 소설의 대표적 시점으로 1인칭 시점이나 전지적 시점을 든다. 그런데 전지적 시점은 인간이 하늘에서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거나 인간의 내면에 들어갈 수 있어야 가능하다. 전지적 시점은 일종의 드론 시점이며 인간은 드론 시점으로 세상을 볼 수 없다. 인간이 땅에서 세상을 조망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시점은 관찰자 시점이며 이 시점은 가장자리에 위치해 있을 때 가능하다. 따라서 제목 ‘가장자리’는 사물을 가장 멀리서 볼 수 있는 시선을 이야기한다. 한편 ‘가장 예쁜 자리’ ‘가장 심심한 자리’라는 문장에는 1인칭의 주관적 마음이 나타난다. 이 그림책의 글에도 객관과 주관의 시점이 교차되어 있다.


이를 그림의 구도와 포커싱으로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이 그림책에서 가장 객관적 시선은 첫 장면으로 하늘에서 학교 건물과 주위 풍경을 내려다보는 그림이다. 아주 작아 보이는 주인공이 큰 운동장 구석에 서있다. 그다음 장면부터 시선은 땅으로 내려온다. 그리고 걷고 뛰고 꽃을 발견하는 어린이의 모습을 점점 크게 보여주다 마침내 바닷가에서 파도에 발을 담그는 장면에 이르면 그림은 아이의 시선으로 파도에 담긴 자신의 두 발을 내려다보며 초점화한다. 이 그림책의 가장 주관적인 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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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다시 바다를 바라보는 어린이의 뒷모습에 초점을 맞춘다. 사람의 뒷모습은 때로 외로움을 불러일으키며 이 그림에서도 혼자 있는 아이의 정서가 전달된다. 하지만 이 책의 구도는 감정 전달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인물과 독자가 바라보는 시선의 방향이 일치하도록 하여 독자가 인물의 시선을 따라가도록 돕기도 한다. 그림들은 어린이가 만나는 다양한 자리와 시선을 골고루 보여주어 그 자리에 머무는 인물의 내면이 독자의 마음에 닿을 수 있도록 섬세하게 배려한다.


요약하자면 바닷가 마을이라는 낯선 공간에 도착한 어린이는 외로워 보인다. 동시에 어린이의 마을 산책은 왠지 즐겁고 호기심도 가득해 보인다. 그것은 그의 눈에 새롭게 나타나는 다양한 풍경과 자연 때문이다. 꽃과 새와 바다라는 대상을 발견하는 순간이 어찌 즐겁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린이는 혼자가 아니라 자연과 동행하고 있으며 그들과 마주한 자신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본래 ‘자리’는 장소를 뜻하는 단어다. 그런데 자리에는 항상 존재가 있고 그곳에 존재의 몸과 마음이 머문다. 꽃이 핀 자리를 가장 예쁜 자리라고 ‘명명’하는 행위는 바로 어린이가 그 자리에 머물고 있다는 의미이며 자신만의 시선과 내면, 곧 나의 자리를 발견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 작품에서 조용한 변화가 일어난다. 전날 밤, 이사 오기 전에 살던 동네의 친구를 떠올리며 별이 가득한 하늘에 친구의 이름을 쓰던 주인공이 다음 날, 마을에서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어린이를 만난다. 비로소 새로운 친구가 등장한 것이다. 처음 만난 두 사람이 조금씩 가까워지는 시간도 자리와 거리로 보여준다. 두 어린이는 각자 가장자리에서 출발해 서서히 가까워져 마침내 나란히 그네를 탄다. 처음 만난 이들이 가까워지는 장면은 마치 아이가 낯선 마을에서 내 자리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을 압축하여 보여주는 듯하다. 드디어 아이는 마을의 손님이 아닌 주인이 되었다.


이 책의 마지막 장면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자리, 가장자리”라는 문장으로 끝난다. 우리는 누구나 1인칭의 시점으로 태어난다. ‘나’로 시작하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고 나의 감정과 욕망을 타인에게 전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다 자라며 ‘나’가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 ‘가장자리’일 수도 있음을 깨닫는다. 인간은 가장자리의 시선을 배울 때 성장한다. 가장자리의 시선과 내 시선을 교차하며 우리는 우리의 자리를 찾는다. 이 작품은 ‘가장’이라는 단어가 가진 두 개의 의미를 흥미롭게 해석하여 우리가 새로운 세계와 어떻게 관계를 맺어가는지 다정하게 들려준다.


오세란_아동청소년문학평론가, 『기묘하고 아름다운 청소년문학의 세계』 저자


- 이 콘텐츠는 <동네책방동네도서관> 2025년 9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 행복한아침독서 www.morningreadi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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