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의 언어로 만나는 제주4·3

by 행복한독서

북받친밭 이야기

김영화 글·그림 / 54쪽 / 32,000원 / 이야기꽃



내가 제주4·3과 만난 것은 이산하 시인의 장편 서사시 『한라산』(1987년 『녹두서평』에 발표)이었다. 대학생 시절 남몰래 읽고 전율했던, 제주4·3 사건을 세상에 공론화한 시다. 1980년대에는 금서를 읽는 것도 처벌을 받았기에 남몰래 읽을 수밖에 없었다. 숨 막힐 정도로 감동적인 이 시를 쓴 시인은 써서는 안 될 이야기를 쓴 죄로 18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역사적 비극인 ‘4·3폭동’(군사정권의 시각)을 미화했다는 죄로 필화를 겪은 것이다. 이 시는 2018년에 ‘제주4·3 항쟁 70주년 기념 복원판’ 시집으로 발행되기도 했다.


제주4·3평화재단에 따르면, 1947년 3·1절 발포 사건과 1948년 4월 3일 무장봉기로 촉발되었던 4·3은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 충돌과 토벌대의 진압 과정에서 2만 5,000명에서 3만 명가량의 선량한 제주도민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제주 인구의 10분의 1 이상이 참변을 당했던 우리 현대사의 엄청난 비극이다. 가옥 4만여 채가 불에 타며 상당수 마을이 폐허로 변했다. 이후 1970년대까지 연좌제와 국가보안법으로 후손들도 피해를 보았다. 4·3은 아직까지 치유되지 않은 제주와 대한민국의 트라우마다.


그리고 여기, 1980년대 같았으면 금서가 되었을 법한 『북받친밭 이야기』가 있다. 흔치 않은 병풍 모양의 그림책인데, 놀랍도록 세밀하게 묘사한 한라산 자락의 ‘북받친밭’ 현장을 담아낸 제주4·3 다큐멘터리 그림책이다. 북받친밭은 제주시 조천읍에 있는 4·3 유적지로, 1948년 12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한라산 일대 중산간 마을 사람들이 대토벌의 광풍을 피해 숨어 지냈던 곳 중 하나인데, 무장대장이던 이덕구(당시 조천중학교 역사 교사)가 최후를 맞았던 곳으로 전해진다. 소설가 현기영은 이덕구를 ‘제주 공동체의 마지막 장두’라 칭했다. 특별한 병풍책을 감싸서 보호하는 케이스 앞면에는 북받친밭의 봄, 뒷면에는 북받친밭의 겨울을 그린 강렬한 펜화가 눈길을 붙잡는다.


이 책은 하나의 짧은 이야기로 구성된 일반적인 이야기 그림책이 아니다. 책은 한 권이지만 어느 쪽부터 읽어도 좋은 과거와 현재가 등을 맞대고 이어지며 사실상 두 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북받친밭 이야기 : 1948년 겨울~1949년 여름』에는 제주4·3에 대한 설명과 당시 경험자들의 증언이 간결한 흑백 스케치풍 그림 위에 담겨있다. 『북받친밭 이야기 : 2023년 겨울~2024년 여름』에는 펜화와 함께 창작의 여정을 담은 문장에 작가의 목소리를 실었다.


책의 압권은 세밀화로 그려낸 한라산 북받친밭의 대작 그림이다. 높이 2.7미터, 길이 17미터의 27폭짜리 장대한 원작 그림을 책으로 옮겼다. 작가가 200일간 하루 12시간씩 쉬지 않고 그린 그림은 붓펜 130개의 잔해를 남겼다 하는데, 그림의 장려함과 비장미, 쏟아부은 정성과 세밀함은 원화에서 대폭 축소된 책에서도 손색없이 전달된다.


현기영의 『순이 삼촌』, 이산하의 『한라산』,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 한상희의 『4·3이 나에게 건넨 말』 등 우리가 읽어야 할 4·3 필독서 컬렉션에 『북받친밭 이야기』를 주저 없이 추천한다. 그림의 언어로 4·3과 만날 수 있는 가장 높은 성취를 우리에게 선물해 준 ‘기억과 연대의 책’이기 때문이다.


백원근_책과사회연구소 대표


- 이 콘텐츠는 <동네책방동네도서관> 2025년 12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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