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 노년을 돌봄의 대상으로 보고 있지만 ‘시니어’는 나약하고 돌봄이 필요한 존재만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는 삶을 제대로 살아볼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니 묻고 싶다. 당신의 ‘오늘의 나이’는 어떠한가요?
오늘을 사는 존재로서 걸음을 내딛는 시간, 모지스 할머니가 75세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며 자신의 삶을 그림으로 가득 채워나갔듯이 ‘자기실현의 주체’로서 ‘나’를 바라보는 것, 그것이야말로 시니어의 시작이 아닐까. 그 삶에서 ‘첫’이라는 의미를 되새겨본다. 무언가 시작한다는 것은 이전에 해보지 않은 일을 한다는 점에서 두려움을 동반하기도 하지만 이전의 삶과 다른 삶을 살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설렘을 동반하기도 한다.
예술적인 감각을 깨워주며 시선을 사로잡는 『첫눈』(엘함 아사디 글, 실비에 벨로 그림, 책빛)은 너무 아름다워 도저히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모노타이프 그림책이다. 섬세한 선과 색채는 흰 눈과 만나 환상적인 풍경을 펼쳐놓는다. 고대 페르시아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옛이야기를 바탕으로 모노타이프로 연출된 맑고 부드러운 이미지는 옛이야기의 신비로움을 더해주는데, 이를 할머니의 목소리로 들려주며 깊이감을 더해준다.
첫눈이 내리던 날 할머니가 들려주는 ‘나네 사르마와 노루즈의 사랑 이야기’는 ‘첫’이라는 현실적인 것과 마술적인 것 사이에서 긴장을 만들고, 시각적인 이미지는 차가운 눈과 따뜻하고 섬세한 봄의 감각이 사랑스럽게 펼쳐지며 서사적 윤기를 더해준다. 특히 온 세상이 흰 눈으로 덮여있을 때조차 적막함의 흰색이 아니라 봄의 빛깔을 잔뜩 품은 색채가 은은하게 드러난다. 이는 언어화 되기 어려웠던 삶의 각양각색의 경험이 연륜과 함께 빛을 발하며 인생의 봄을 맞이하는 인간의 모습과도 닮아있다.
그림책의 이야기는 무한한 예술성을 마음껏 펼쳐놓으며 순환적인 계절의 향연으로 그려진다. 야생화 속에서 잠든 신비로운 여인 나네 사르마와 얼어붙은 호수를 녹이고, 강물을 다시 흐르게 하고, 꽃을 피우는 노루즈는 결코 만날 수 없다. 그러니 나네 사르마와 노루즈는 서로의 얼굴을 알지 못한다. 틈틈이 사이사이 스치고 간헐적으로 지나갈 뿐이다. 나네 사르마와 노루즈가 서로를 스쳐 지나가며 삶에서의 기쁨과 슬픔, 고통과 기다림, 아쉬움과 서글픔을 겪지만 해를 거듭하며 아픔과 고통, 슬픔조차도 견디는 힘이 생긴다. 영원한 것이 있다면 나네 사르마와 노루즈의 사랑이 아닐까.
노루즈는 마을로 올 때 ‘봄과 함께 따뜻한 온기’를 가져오지만, 나네 사르마의 봄의 이미지는 오직 상상으로만 가득 채워진다. 흰 눈으로 뒤덮인 풍경, 하늘 높이 섬세한 선으로 그려진 물건, 사람들의 모습에 덧입혀진 의복, 모자, 머리 장식의 이미지는 사람들 각각의 개별성을 돋보이게 한다. 온 세상이 흰 눈으로 덮여도 그 안의 빛깔들은 봄의 색을 머금고 더욱 아름답게 빛이 날 수 있다는 것, 이 아름다운 빛을 발견하도록 하는 힘, 그 힘이 그림책에 담겨있다.
시니어를 위한 그림책은 예술성의 향유 주체가 되기 위한 간결한 글과 상징성을 지닌 시각 이미지로 전 세대를 아우르며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글과 그림의 언어적인 한계를 넘나드는 자유로움을 지닐수록 전 세대 간 소통의 범위를 넓혀줄 수 있다. 나이 듦은 단순히 나이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감각이 무디어질 때, 노년으로 들어서게 된다. 예술적인 체험을 할 수 있는 아름다운 그림책은 노년으로 들어서는 독자에게 잊고 있던 감각을 깨우는 데 충분하다. 특히 야생화 속에서 잠든 신비로운 여인의 모습과 파란색으로 표현한 시간의 흐름을 마주하며 자신의 인생을 아름다운 구슬로 꿰어보는 것도 가능해지리라.
이전의 삶의 구슬을 아름답게 꿰었다면, 이제 사려 깊은 마음으로 새로운 시작을 준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량덕 작가의 『시작점』(사계절)은 내 안에서 꼭꼭 닫혀있던 문을 조심스럽게 똑똑 두드린다.
느른한 날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하며 다가오는 소리는 고요하지만 더없이 맑다. 매일의 일상에서 시작은 늘 낯설고 긴장된다. 그러나 시작점의 작은 발견은 독자의 경험을 움직이게 만들기도 하고, 골똘히 생각하며 멈추게도 하고, 새로운 시작을 가능하게 하기도 한다. “식물을 키우는 일은 봄을 만나는 일”과 같고, “작은 물고기는 바다 여행을 위해 튼튼해져야” 하는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는 이전과 다른 시선을 가져야만 한다. 그림책의 이야기는 이전의 삶과 다른 작은 점 하나를 새롭게 바라보는 시선, 이렇게 놓인 점 하나가 상상과 사유를 건드리며 확장된다. 그동안의 충분한 경험을 기반으로 열어갈 ‘시작점’은 자신만이 알고 있다.
영화 「반지의 제왕」의 씩씩한 호빗 프로도, 호기심 많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앨리스, 영화 「에일리언」의 용감한 우주 비행사 엘런 리플리 같은 인물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그들은 모두 불확실한 모험을 찾아 과감하게 그 ‘시작점’의 문을 열고 나아갔다. 그들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여행을 떠났기 때문이다. 이들의 모험은 험난하지만 자유롭고 활기차며 자기 주도적이다.
그림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다다르면 “이제 여행이 시작됩니다”라는 문장과 함께 처음 “똑똑” 두드렸던 문 하나가 다시 그려진다. 작은 점 하나가 만들어낸 이야기는 수많은 시작을 상징하며 시작점을 향해 나아가게 한다. 그 시작점이 행복만을 담보하지는 않지만, 분명 자유롭고 활기차다. 시니어라는 나이는 누군가의 제약에서 벗어나 온전히 자신만의 선택으로 자신의 길을 걸어볼 수 있는 나이이며, 그 시작점을 향해 자유롭고 경쾌한 발걸음을 비로소 시작해 볼 나이이다. 그림책 『시작점』과 함께 그 경쾌한 발걸음을 시작해 보기를 바란다.
조성순_아동문학평론가, 자작나무 책방 대표,『한국 그림책의 역사』 저자
-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6년 2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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