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날
김형규 글·그림 / 60쪽 / 18,000원 / 달그림
“서서히 녹아내렸습니다.” 수제화 디자이너이자 작은 구두 회사의 경영자로 누구보다 성실히 일했던 그림책 속 주인공은 사업 실패의 순간을 ‘무너졌다’가 아닌 ‘녹아내렸다’고 말한다. 고체가 액체가 되고, 이내 증발하여 공기 중으로 흩어져 버리는 얼음처럼 그의 삶과 자부심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 상황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대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는 그저 성실했을 뿐이라고 고백한다. 그림책 장면마다 등장하는 먹이를 찾아 쉼 없이 움직이는 개미 떼처럼 매 순간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찾아온 실패는 중년의 가장을 하루아침에 가족에게 상처를 준 죄인으로, 날아드는 세금과 고지서 앞에서는 무력한 채무자로 만들었다.
그런 그가 수백 통의 이력서를 던진 끝에 닿은 곳은 물류센터 일용직 노동의 현장이다. 긴장감 속에 맞이한 첫 출근날, 굉음을 내며 돌아가는 컨베이어벨트 사이에서 그의 시간은 더디게만 흐른다. 그러나 인간의 놀라운 적응력은 어김없이 ‘익숙함’을 선사한다.
이 그림책은 김형규 작가의 자전적 기록이자,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작가의 전작 『뜨거운 성수동에는 구두가 있다』가 세상에 나온 지 채 일 년도 지나지 않아 그의 구두 공장은 문을 닫았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뜨거운 ‘핫플레이스’로 꼽히는 성수동의 이면에는 이처럼 자리를 지키던 구두 공장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그곳에서 삶을 일구던 이들이 실직의 파도에 밀려나는 차가운 현실이 존재한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24년 상반기 비자발적 실직자 중 50대의 비중이 27.1퍼센트로 가장 가파르게 증가했다. 상공회의소 조사에서 재직 중인 중년층도 84.5퍼센트가 재취업 의사를 밝힐 만큼 ‘일’에 대한 갈망은 절박하다. 부모 부양과 자녀 양육, 노후 준비라는 ‘삼중고’를 짊어진 중년들, 특히 실직 중장년에게 일자리는 곧 생존이자 존엄의 마지노선임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래픽디자인을 전공한 작가는 삶의 터전이 사라진 주인공의 심리적 궤적을 강렬한 시각 언어로 표현한다. 과감한 색채와 패턴, 때로는 섬뜩함마저 느껴지는 기괴한 이미지들은 가장이 느끼는 압박과 불안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화면 곳곳에 배치된 활자들 역시 단순한 텍스트를 넘어 서사의 일부로 작동하며 마치 영국의 거장 찰스 키핑의 작품처럼 해석의 몫을 독자에게 넘긴다.
물류센터의 낯선 환경에 익숙해지는 자신이 두렵다는 작가의 마지막 고백은 노동이 생계 수단을 넘어 인간의 정체성과 얼마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며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지금 가는 길은 어디인지, 그리고 그 길 위에서 우리는 무엇을 잃지 말아야 할 것인지 말이다.
최정은_그림책 활동가, 『집을 나선 여자들』 저자
-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6년 3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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