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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독서 Aug 19. 2021

페미니즘으로 읽는 그림책

페미니즘 관점에서 그림책을 읽는 건 가부장제 사회 남성 중심의 시선을 넘어 다양한 관점으로 그림책을 만나는 힘이 된다. “여성을 철저하게 배제해온 주류 역사가 여성들을 무력하게 만드는 의도적인 문화 기제임을 깨달은 뒤 그림책을 쓰게 되었다”는 영국 작가 재키 플레밍의 말을 깊이 들여다보아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의도적인 문화 기제 중 여성을 ‘몸’으로만 바라보는 왜곡된 시선이 있다. 지하철 광고판을 도배하는 성형수술 광고들에서 알 수 있듯 남성의 관점이 권력을 지닌 사회에서, 여성들은 자신이 정말 원하는 건 도외시한 채 타인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만을 욕망하며 살아가기 쉽다. 지난해 화장과 다이어트 같이 여성에게만 유독 강요되는 규격화된 미적 기준을 벗어나자는 취지로 시작된 ‘탈코르셋’은 더는 몸으로만 인식되고 싶지 않은 여성들의 갈망이 도화선이 된 페미니즘 운동이었다.


세상을 바꾸는 공주의 서사

그림책 『종이 봉지 공주』(로버트 먼치 글 / 마이클 마르첸코 그림 / 비룡소)의 주인공 엘리자베스 역시 탈코르셋으로 진짜 자기 자신의 욕망과 만나게 된다. 제목 그대로 ‘종이 봉지’를 입은 공주 엘리자베스가 처음부터 종이 봉지를 입었던 건 아니다. 그가 살았던 성에는 예쁘고 좋은 옷들이 많았으니까. 어느 날 무서운 용 한 마리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용은 성을 부수고 뜨거운 불길을 내뿜어 공주의 옷을 모두 불태워버린다. 그리고 공주와 결혼하기로 되어있던 로널드 왕자를 잡아간다. 옷이 몽땅 타버려서 입을 옷이 하나도 없었지만 그때 마침 눈에 띈 종이 봉지를 주워 입고 왕자를 구하러 용을 찾아 나선 엘리자베스. 왕자가 용을 죽이고 공주를 구해내 행복하게 살았다는, 태곳적부터 익숙한 서사를 과감하게 깨뜨린 셈이다.


신화학자인 조지프 캠벨은 영웅이 등장하는 신화에서 영웅의 임무는 용이나 뱀으로 상징되는 우주의 부정적인 측면을 살해하고 우주의 자양분이 되는 생명 에너지를 자유롭게 해방시킨다고 보았다. 그런 점에서 그림책 『종이 봉지 공주』에서 영웅은 왕자가 아닌 공주다.

하지만 그는 대개의 남자 영웅들처럼 빛나는 갑옷을 입고 있지 않다. 남루하다고 말하기도 궁색한 종이 봉지가 유일한 옷. 아니, 생각해보니 공주는 처음부터 갑옷을 갖고 있지도 않았다. 용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로 활활 타올라 재가 되어버린 공주의 옷들은 모두 하늘하늘, 연약한 질감의 드레스들 뿐이다.


용으로 인해 몽땅 재가 되어버린 공주의 옛날 옷들이, 그에게 오히려 그전과는 다른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날 기회를 준거라 느껴진 건 결코 과장이 아니다. 절박한 순간에 자신을 보호조차 하지 못하는 공주의 옷들은 가부장제가 오랜 세월 동안 여성들에게 주입하고 강요했던 성 고정관념의 부산물처럼 보이니까.


흔히 여자아이는 분홍색 옷, 남자아이는 파란색 옷을 입혀야 한다는 성 고정관념은 놀랍게도 20세기에 들어서야 나타났다고 한다. 1700년대 유럽의 초상화를 보면 흥미롭게도 분홍색 옷을 입은 소년들을 자주 발견할 수 있는데, 1918년 대중들에게 널리 읽혔던 영국의 한 저널에서는 “일반적인 통념에 따르면 남자아이에게는 분홍이, 여자아이에게는 파랑이 좋다”는 문장 또한 만날 수 있다. 작가 시몬 드 보부아르의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말에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종이 봉지 공주』에서 엘리자베스는 분홍도 파랑도 아닌 칙칙한 종이 봉지로 겨우 몸만 가린 채 길을 떠난다. 그리고 그 길은 그 전의 ‘나’가 죽고 새로운 ‘나’를 만들어가는 길임에 분명해보인다. 쳐다보기만 해도 몸이 오그라들 것 같은 용을 엘리자베스가 용기 있게 직면한 것도, 삶의 바닥까지 내려앉은 그에게 용을 죽이는 것만이, 자신이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어서가 아닐는지.


그런데 용과 싸우는 방법이 여느 영웅 서사와 많이 다르다. 대부분의 왕자들이 날카로운 칼로 용을 찔러 죽이는 것에 반해 기지와 지혜를 발휘해 용을 이기는 공주! 한 번 불을 내뿜으면 열 군데 숲도 거뜬히 태워버리는 용의 능력을 칭찬해주자 허세 가득한 용이 숲 백 군데를 한숨에 불태워버리는데, 이런 일련의 과정을 반복하게 함으로써 용이 제풀에 지쳐 쓰러지게 만든다.


반전은 공주를 본 왕자의 태도다. 공주의 행색이 엉망이라며 진짜 공주처럼 챙겨 입고 다시 오라는 망발을 하는 것이 아닌가! 자신을 힘겹게 구해준 공주에 대해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이! 그러자 엘리자베스는 왕자가 평생 잊지 못할 통쾌한 대답을 용이 불을 뿜듯 일갈한다. 


그래 로널드, 넌 옷도 멋지고 머리도 단정해. 진짜 왕자 같아. 하지만 넌 겉만 번지르르한 껍데기야!
ⓒ비룡소(『종이 봉지 공주』)


마지막에 태양이 솟아오는 길을 향해 혼자 신나게 걸어가는 엘리자베스의 뒷모습은 보기만 해도 환한 웃음을 자아낸다. 물론 공주는 왕자와 결혼하지 않았고, 용과 싸워 이긴 경험은, 앞으로 누군가 그에게 또다시 맞지 않는 옷을 입으라고 강요할 때 용기 있게 거부할 수 있는 힘이 되어줄 것이다. 그 힘은 다름 아닌 세상을 바꾸는 힘!


차별 없는 자유로운 사회로

그림책 『치마를 입어야지, 아멜리아 블루머!』(섀너 코리 글 / 체슬리 맥라렌 그림 / 아이세움)의 주인공 아멜리아도 자신을 억누르는 코르셋을 용기 있게 벗어서 세상을 변화시켰다. 1818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난 실존 인물인 아멜리아는 여성의 인권 향상을 위해 애쓴 운동가로 당시 무게가 많게는 18킬로그램까지 나가는 무거운 치마와 허리를 꽉 졸라매어 숨 쉬기도 힘들게 만들었던 코르셋을 입어야 하는 현실이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헐렁한 바지 위에 짧은 치마를 입는 편안한 옷차림의 ‘블루머’. 이후 블루머는 여러 스타일로 변화되었고 요즘 여성들이 바지를 입을 수 있는 근간이 되었다.


당시 블루머를 입었던 아멜리아는 가부장제 사회가 지정해준 무거운 치마와 코르셋을 입지 않았다는 이유로 온갖 조롱과 비난을 받아야만 했다. 이유는 단지 그가 세상이 생각하는 ‘올바른 숙녀’가 아니었기 때문이라니, 놀랍지 않은가? 하지만 아멜리아는 가부장제 사회가 마치 규격 상품처럼 지정해준 ‘올바른 숙녀’가 절대 되고 싶지도 않았을뿐더러 못마땅했다. 나 역시 어렸을 때부터 이해되지 않아 못마땅한 것들이 많았다. 왜 로봇 장난감을 갖고 놀 때면 “여자아이가 무슨 로봇을 갖고 놀아?”라는 말을 들어야 했는지. 또 예쁜 인형을 갖고 노는 남자아이들에게 어른들은 “계집아이처럼 뭐하는 짓이냐?”라고 타박을 주는지 등등.


1978년에 만든 스페인 그림책 『여자와 남자는 같아요』(플란텔 팀 글 / 루시 구티에레스 그림 / 풀빛)는 

“여자와 남자는 동등하다고 해요. 하지만 남자는 여자보다 중요해 보여요. 여자는 남자보다 중요하지 않아 보여요”

라는 문장들로 시작한다. 그리고 뒤이어 나오는 이야기는 아멜리아와 내가 지녔던 못마땅한 질문들과 비슷하다. 왜 어른들은 남자아이들에겐 “용감해야지, 강해지거라, 최고가 되어라”라고 말하면서 여자아이들에겐 “정말 예쁘구나, 참 말을 잘 듣네, 참 여자답구나”라고만 하는지 말이다.


아멜리아가 코르셋을 벗은 지 백 년이 훌쩍 넘었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가 벗지 못한 코르셋은 여전히 많다. 그러나 엘리자베스처럼, 또 아멜리아처럼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선택하는 여성들이 많아질수록, 또 이를 공감하는 남성들이 많아질수록, 여성들을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세상 모든 코르셋들은 벗어질 것이다. 혐오와 차별이 사라진 세상, 서로 다름을 존중할 수 있는 평화로운 세상으로 우릴 초대할 것이다.


ⓒ풀빛(『여자와 남자는 같아요』)


이야기 속 주인공을 응원하는 그림책

문득, 그림책 『세상 끝까지 펼쳐지는 치마』(명수정 글·그림 / 글로연)의 치마를 입은 한 여자아이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이 치마 세상 끝까지 펼쳐져?”란 질문으로 시작된 그림책은 종이 봉지 공주를 비롯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빨간 머리 앤 등 스물네 명의 이야기 속 여성 주인공들에게 바치는 헌사와도 같다. 아이는 꿀벌, 꽃송이, 무당벌레, 부엉이, 물고기처럼 생명을 가진 존재들에게 반복해서 물어본다. 

“네 치마가 세상 끝까지 펼쳐져?”

아이가 질문을 던질 때마다 이야기 속 여자 주인공들은 두 명씩 짝을 지어 나타나는데, 마치 그 질문이 더 크게 자라나 답을 얻을 수 있도록 아이 옆에서 응원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마침내 세상 끝까지 펼쳐진 치마가 아름다운 빛깔로 지구를 덮을 때까지!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건 세상이 당연하다고 말한, 하지만 당연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질문이라는 걸, 그 질문이 주는 눈부신 나비효과라는 걸. 좁은 코르셋을 벗어난 여성들이 이제는 세상 끝까지 자유로이 나아갈 수 있다고 그림책은 말한다. 그래서 그림책 속 어떤 한 문장은 계속 마음속을 맴돌며 떠나지 않았다.


“물고기야 물고기야, 네 치마 세상 끝까지 펼쳐져?

“아니, 하지만 커다란 물결이 치면 그럴 것 같아.”


윤정선_작가, 『조금 다르면 어때?』 저자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19년 2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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