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미래를 위해 필요한 교육
모두를 위한 성평등 공부
이나영 외 5인 지음 / 376쪽 / 17,000원 / 프로젝트P
2020년을 성명문 쓰기로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여성의 노력 덕분에 ‘n번방’ 사건에 대해 뒤늦게 알게 되고, 뭐라도 하고 싶은 마음에 교육부의 적극적인 개입을 요구하는 성명문을 썼습니다. 교사인 저에게는 의무교육을 받는 나이의 피해자들이 있다는 사실이 너무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왜 아무도 교사에게 도움을 청하지 못했던 걸까요.
학교 안에서 교사의 입을 통해 이루어지는 교육을 생각하면 쉽게 원인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남자아이의 성욕에 대해서는 안전하게 자위하는 법을 가르칠 정도로 당연시하면서 여자아이의 성욕에 대해서는 음핵(클리토리스)이라는 단어 하나 가르치지 않을 정도로 터부시하는 교사를, 성폭력을 피하려면 피해자가 조심해야 한다고, 모르는 어른과 이야기하지 않고 함부로 몸이 보이는 옷을 입어서도 안 된다고 말하는 교사를 아이들은 자신의 편으로 여기기 어려웠을 겁니다. 피해 사실을 말하는 즉시 왜 그런 사진을 찍었냐, 왜 모르는 사람과 채팅을 했냐며 교사가 가장 큰 2차 가해자가 되어서 자신을 혼내고 윽박지르는 모습을 상상했겠지요.
이런 사건이 터지면, 늘 전가의 보도처럼 불려 나오는 것이 성평등 교육입니다. 그러나 페미니스트 교사의 수업권 보호는커녕 자신의 학생에게 친절하고자 한 평범한 교사의 안전조차 지켜주지 않는 사회에서, 마치 처음 보는 끔찍한 세대가 나타난 것처럼 호들갑을 떨며 성평등 교육 강화를 외치는 이들의 목소리가 달갑지 않게 들리기도 했습니다. 같은 교육을 받았는데, 어떤 아이는 ‘스쿨미투’의 주역이 되고 어떤 아이는 n번방을 운영합니다. 내가 아무리 디지털 성폭력의 끔찍함에 대해 가르친다고 한들, 우리와 똑같은 스마트폰을 통해 아이들이 접속한 세상에선, 여성의 몸을 불법 촬영해 유포하는 자들이 돈과 명예를 얻고, 처벌은 한없이 가볍게 받고 있습니다. 스쿨미투로 학교를 잠시 떠났던 교사들은 대부분 돌아왔습니다. 사회가 이런데 한 페미니스트 교사 개인의 교육이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요, 교육을 통한 사회의 변화가 가능한 일일까요?
『모두를 위한 성평등 공부』는 이런 고민에 대한 해답을 주는 책은 아닙니다. 그저, 각 분야에 속한 연구자들의 친절한 설명을 통해 과거에도 누군가가 나와 같은 고민을 했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수업 사례처럼 당장 현장에 적용 가능한 이야기는 적지만 여성운동, 성평등 교육의 역사적 흐름이나, 제도적인 부분을 통시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성평등 교육의 방향을 고민하게 되는 지금 더욱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예 성별 분리를 해서 가르쳐야 하는 것이 아닐까 고민하다가, 학교 내 성평등은 사회경제적 성평등이 실현되지 않는 한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의심하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당장 내일 옆 반 선생님들에게 나눠줄 ‘디지털 성범죄’ 교수학습 자료를 만드는 교사들의 고민을 과거의 누군가도 이미 해왔다는 것. 그래서 페미니스트 페다고지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이름까지 붙여놓은 다양한 계보가 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배울 수 있었습니다.
위안부 운동부터 성적 자기결정권, 디지털 성폭력과 미디어를 통해 재현되는 여성까지 지금 성평등 교육이 가장 관심을 기울여야 할 주제에 대해 탄탄한 이론적 배경을 바탕으로 가슴이 탁 트이는 친절한 설명이 덧붙여집니다. 특히 제5장은 ‘순결 교육’을 넘어 ‘동의’란 말이 막 들어온 학교 현장의 성교육이 빠지기 쉬운 함정에 대해, 『춘향전』 사례를 통해 실감 나게 설명합니다.
라는 식의 교육은 순결의 대체 용어로 성적 자기결정권을 쓰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이야기가 특히 인상 깊었습니다.
많은 교사가 책 속에서 당장 내일 써먹을 수 있는 ‘수업’을 찾습니다. 지금 당장 아이들이 혐오 표현을 쓰고, 아름다워지겠다며 자기 몸을 학대하는데, 뭐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에 조급해집니다. 그런데 막상 수업하고 나면, 유유히 흐르는 강을 가로막으려는 철없는 돌멩이가 된 것처럼 내가 하는 수업의 영향력은 참 작다는 걸 깨닫습니다. 지금처럼 ‘흐르는 강’이 전면에 드러난 상황이 벌어지면 사회가 변하지 않는 이상 교육은 아무 힘이 없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긴 호흡으로 바라보면 여성들은 이미 다른 여성을 만나 많은 변화를 이루어왔고 영영 해결되지 않을 것 같은 문제들을 해결해왔습니다. 스쿨미투를 외치고, 불법 촬영이란 말을 만들어내고, 낙태죄를 폐지한 여자들 옆에 나도 가만히 서봅니다. 내가 하는 수업을 들은 단 한 명의 아이라도, 위기의 순간 그래도 선생님 한 분은 내 편이라고 생각할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그 아이가 언젠가 내 옆에 설 순간을 상상합니다. 돌멩이가 모이고 모여 강물의 흐름을 바꿀 날을 떠올립니다. 평범한 우리가 함께 만들어낼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나의 몫을 하려는 ‘가르치는 사람들’에게 나아갈 방향을 설정하는 데 도움을 줄 이 책을 권하고 싶습니다.
서한솔_초등성평등연구회 교사
이 콘텐츠는 <동네책방동네도서관> 2020년 5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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