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행복한독서 Aug 20. 2021

나는 페미니스트 주치의입니다

왕진 가방 속의 페미니즘

추혜인 지음 / 336쪽 / 16,000원 / 심플라이프



왕진 가방 속의 페미니즘? 궁금증이 이는 낯선 제목이다. 책을 집어 들면, 웃는 얼굴로 자전거를 타고 가는 의사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이건 드문 책이다. 저자가 의대생에서 마을 의사가 되기까지 20년이 걸렸고 여성주의 의료협동조합인 ‘살림’이 창립된 지 8년이 되었다. 여성주의로 새로운 세상을 꿈꾼 이들의 지난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 속에서 찾아낸 반짝이는 보석 같은 깨달음이 알알이 박힌 책이다. 이런 책을 만날 수 있어 기쁘다. 언젠가 꼭 한번 만날 거라고 믿고 있었던 책이다. 


책을 들자마자 새벽까지 뜬눈으로 샅샅이 읽었다. 저자의 말투는 시종일관 경쾌하고 씩씩하다. 갈등 앞에서 통 크게 화해하고 거침없이 나아간다. 눈물보다 웃음을, 실망보다 낙관을, 실패보다 새로운 꿈을 가슴에 품고 있다. 읽으면서 눈물이 울컥 나는 건 글쓴이가 만난 진짜 현실의 사람들 모습 때문이다. 아프고 모르고 말 못 한 이들이 얼마나 자신과 가족과 이웃의 건강을 지켜주고 싶어 했는지,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노력했는지 알려주는 말들 때문이다. 그 진심을 목격하고 전해주려고 애쓴 글쓴이의 노력 때문이다. 


저자인 추혜인 의사는 서울시 은평구에 있는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살림의원’에서 일한다. 대학생 때부터 페미니스트로 활동한 그녀는 병원이 세워지고 지역에 뿌리내리기까지 모든 과정을 함께했다. 남들은 불가능하다고 고개를 저을 법한 일을, 단지 사람들의 힘을 믿고 일구어냈다. 동네 주치의가 되어 지역 주민들의 질병과 상처 앞에서 진료를 통한 연대를 실천했다. 상업화된 의료 현실을 비판하며 건강을 진짜 지키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성찰했다. 불평과 불만, 공격과 한계 속에서 소통하고 서로 원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물어가며 더듬더듬 가능한 길을 찾아갔다. 


사람들은 연결되어 있고 건강의 문제도 마찬가지라고 저자는 말한다. 여성주의 의료기관은 성별, 성별 정체성, 직업, 계급, 인종, 나이, 학력에 따른 차별 없이 진료를 받을 수 있는 곳이다. 어떤 고통이든 무시하지 않고 들어주는 곳이다. 소수자의 고통을 믿고 이를 설명할 언어를 찾아내는 것이 진료의 과정이기도 하다. 환자가 병원에 왔을 때뿐 아니라 동네에서 그가 사는 모습까지 상상하며 만나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증상뿐 아니라 욕구를 이해하고, 고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 통증의 이유를 찾아내 알려주고 환자가 자책하지 않고 자신을 돌볼 수 있게 지지한다. 환자 옆에서 묵묵히 돌보는 이들의 처지에도 눈길을 주고 그 상황이 좀더 나아지길 응원한다. 


웃음을 잃지 않는 그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책 속에 답이 있다. 

“그것은 내가 페미니스트 주치의이기 때문입니다.” 

페미니즘은 자신을 돌보고 다른 이와 진정한 관계를 맺는 건강한 길이라고 저자는 확고하게 말한다. 아울러 페미니즘 없이 건강한 세상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까지 말이다. 이런 병원과 의사가, 페미니스트들과 이웃들이 있어서 동네가 더 안전하고 서로 돌볼 수 있는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모두가 차별받지 않고 함께 살 수 있는 세상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열렸다. 


안미선_작가, 『당신의 말을 내가 들었다』 저자


이 콘텐츠는 <동네책방동네도서관> 2020년 12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행복한아침독서 www.morningreading.org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