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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드 큐레이터 서윤 Feb 17. 2023

마음의 연고가 필요할 때

추억 한 끼 무 전

겨울비가 보슬보슬 내린다. 비가 내리면 왠지 모르게 시리고 앙상했던 마음이 포근해지며 스르르 그리움을 불러온다. 토닥토닥 빗소리를 듣고 있다 보면 아이들에게 간식으로 부침개를 만들어 주던 시절이 생각난다. 어린 참새들 마냥 프라이팬에서 구워지기가 무섭게 접시를 내미는 아이들 모습은 마치 먹잇감을 입에 넣어주는 어미새처럼 뿌듯함과 행복함이 올라왔다. 가끔 이렇게 겨울비가 내릴 때면 어릴 적 할머니가 해주시던 무전이 떠오른다. 


비 오는 날에 밀가루 음식을 먹으면 우울한 기분이 좋아진다는 것을 할머니는 아셨을까? 비만 오면 집에 보내달라 떼를 쓰는 어린 나를 둘러업고 할머니는 구슬 같은 땀을 흘리시며 황토 아궁이에 불을 피우셨다. 매운 연기에 콜록콜록 할머니의 잔기침 몇 번이면 마법사처럼 아궁이에 뜨거운 불꽃을 만들어 내셨던 할머니. 그렇게 한참 동안 붉은 꽃무더기 불꽃이 자글자글 가라앉고 나면 할머니는 마루 밑 토방에서 말라비틀어진 가을 무를 꺼내 동글동글 살짝 도톰하게 썰어 무전을 준비하셨다. 썰어놓은 무를 소금물을 입힌 뒤 가마솥 안에 대나무 채반을 얹고 젓가락이 푹 들어갈 만큼 쪄내셨다. 한 김 식힌 무를 고운 밀가루에 묻혀 반죽물을 입히셨다. 아마도 무전에 입혀진 반죽이 홀라당 벗겨지는 것이 아쉬웠을 것이다. 달아오른 가마솥뚜껑 안쪽에 들기름을 두르고 나서 무 한토막을 썰어 솥뚜껑 안쪽에 쓰윽 한번 닦아내고 반죽옷을 입은 무를 올리면 오래된 부뚜막에 고소한 전 냄새가 퍼지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두툼한 손으로 갓 부쳐낸 무전에 간장 양념 한 스푼 얹고 호호 입바람으로 식혀 내 입에 넣어 주셨다. 당신 입으로는 한두 입 먹고선 내 입이 기다릴 새도 없이 넣어 주셨다. 가끔 급하게 받아먹느라 입천장이 델 때면 시원한 동치미 국물로 달래 주시기도 했다. 추운 날 할머니의 부엌 한편이 따뜻해질 때쯤 아궁이 앞에서 쭈그리고 앉아 할머니가 부쳐 주시던 부드라운 무전을 받아먹을 때면 나는 어린 강아지가 되어야 했다. 

"우리 강아지 많이 묵어잉~ 아이고 우리 새끼 잘도 묵네, 할미가 또 해줄 테니 엄마 보고 싶으면 말해라잉~" 

그렇게 할머니의 무전으로 뜨듯하게 배를 채우고 나면 언제 엄마가 보고 싶었냐는 듯이 어린 강아지처럼 할머니의 품속에서 스르륵 잠이 들곤 했다. 겨우내 부모님과 떨어져 지내느라 마음이 얼어붙은 어린 손녀딸의 그리움에 배앓이를 할 때마다 할머니는 위에 좋은 무전으로 보고픈 엄마를 대신해 주셨다.


가끔씩 아이들을 키우면서 화가 나고 속상할 때마다 무 반 개를 강판에 곱게 갈고 밀가루나 감자가루 3스푼 소금 한 꼬집 설탕 반 스푼을 넣어 반죽을 해서 약한 불에 한 입 먹을 크기로 부쳐 아이들에게 무 전을 만들어 주었다. 찹쌀 부꾸미 같은 느낌으로 쫀득쫀득 부쳐 먹다 보면 어느새 화는 가라앉고 프라이팬을 돌리기에도 바쁘다. 식기 전에 한입이라도 더 먹이기 위해 아이들을 불러 모아 입안에 하나씩 넣어주는 내 모습은 어릴 적 할머니의 모습을 닮아 있었다. 그렇게 불꽃 잠재우듯 마음의 화를 가라앉히며 부엌에서 시간을 보내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화가 한 김 삭히게 된다. 아이들도 배가 부르니 그때서야 엄마가 왜 화가 났었는지, 왜 속상했었는지 얘기하다 보면 내 마음도 한결 부드러워지고 아이들의 표정도 환하게 밝아져 있었다. 옛날 어르신들이 배따시고 등따시면 세상 걱정 없다는 말씀이 딱 맞는다. 


세월이 지나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예민하게 신경이 쓰이거나 속상한 감정으로 마음이 산란해질 때면 위염으로 고생을 한다. 소화제를 달고 살기도 하고 때로는 급성 위궤양으로 응급실 신세를 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어릴 적 할머니께서 만들어 주시던 무 전은 나에게 치유의 음식이 되곤 했다. 아니 어쩌면 할머니가 지그시 나를 바라봐주시던 옛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허기가 가라앉았는지도 모르겠다. 


할머니도, 나의 엄마와 나도 자식들에게 서운하고 속상한 말을 꺼내지 못할 때 음식은 서로 마음에 생채기를 내지 않고도 화해를 만들어 주었던 마음의 보자기가 되어 주었다. 추적추적 빗소리를 들으며 고소한 기름기가 입안을 휘저을 때의 추억 한 끼는 빗방울의 노랫소리처럼 오늘도 내 마음에 위로가 되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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