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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니나 Jul 28. 2021

저예산 여행의 의미


북아프리카에서 가장 높은 아틀라스 산맥 꼭대기를 향해 떠났다.



드디어 출발이다. 길을 나서기 전, 친구들과 손을 맞잡고 좋은 산행길이 펼쳐지도록 행운을 빌었다. 초반 산행은 그리 힘들지 않았다. 스페인에서 900km에 달하는 산티아고 길을 걸으며 몸이 단련되었는지, 산길을 걷는 게 어렵지 않았다. 가뿐한 몸으로 내내 선두에서 걸었고, 힘들어하는 마테오와 라파엘의 배낭을 대신 들어주기도 했다. 내 몫으로 선뜻 작은 배낭을 할당해 주던 친구들은 나의 당찬 모습을 보고선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내가 걷는 걸 힘들어하지 않는 걸 보고선 “걷기 기계(walking machine) 같다”며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야니스가 말을 걸어왔다.     



“얼마 전에 네게 아틀라스를 함께 가자고 제안하긴 했지만, 마테오와 난 네가 힘들어하지 않을까 계속 걱정했어. 지금 네 모습을 보니 괜한 걱정이었다는 생각이 드네. 네가 산행을 잘할 수 있을지 걱정한 게 아이러니야.”     






길은 세계 각국에서 온 등산객들로 넘쳐났다. 개중에는 전날 마을에서 만나 이미 친분을 쌓은 친구들도 있었다. 비교적 평탄한 길을 따라가다 보면 꼭대기까지 굉장히 가파른 경사로 이어지는 구간이 나오는데, 이 구간에 접어들기 바로 전인 약 3,200m 지점에 두 채의 산장이 있었다. 우리가 목표로 둔 투브칼 봉우리(Djebel Toubkal)는 산장을 지나 4,167m 지점에 있었다.



한참 산길을 걷다 보니 산장이 나타났다.



하루 안에 정상에 다다르는 건 불가능하다고 여겨 하룻밤을 산에서 묵기로 했다. 넉넉한 예산으로 여행하고 있던 야니스, 라파엘과는 달리 나와 마테오는 산장에 숙박할 비용조차 없었다. 침낭이 있으니 어디서든 잠을 잘 수 있지 않겠냐며 대책 없이 올라온 우리는 산장의 지배인들에게 바닥에서 자게 해 달라고 부탁하였으나, 즉시 거절당했다. 하는 수 없이 우리는 야니스와 라파엘에게 현금을 빌려 산장에서 묵기로 했다.


두 산장 중 침대가 비치된 곳이 텐트를 이용하는 곳보다 가격이 두 배 비쌌고, 야니스와 라파엘은 침대가 있는 산장에 이미 체크인을 한 상태였다. 마테오와 나는 한참 동안 어느 곳에서 머물지 고민했다. 저렴한 숙소를 이용해 돈을 아낄지 그렇지 않으면 값을 좀 더 주고서라도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지 결정해야 했다. 고민하던 마테오가 문득 말을 건넸다.     



마테오



“수, 난 네 선택에 따를게. 두 숙소 중 어느 곳에 머물든 상관없어. 얼마 되지 않는 돈이 과연 우리의 삶을 바꿀 수 있을지는 좀 더 고민해 보자.”     



의미심장한 마테오의 말에 고민은 깊어져만 갔고, 당장 친구들에게 돈을 빌리더라도 산행을 마치자마자 통장에 얼마 남지 않은 돈을 인출하여 갚아야 했기에 함부로 결정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좀 더 비싼 숙소에 머물며 네 명이 갈라지지 않는 선택지를 택했다. 지금 당장 몇천 원을 아끼기 위해서라면 마테오와 둘이서 텐트를 이용할 수도 있었지만, 서로 다른 나라에서 온 친구들과 이렇게까지 마음을 모아 여행한 적이 드문 데다 각자의 일정상 헤어져야 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을 허투루 날리고 싶지 않았다. 오늘 밤 몇천 원을 더 쓴다고 해서 딱히 후회할 일이 일어날 것 같지도 않았다. 


결정을 내리고선 마테오와 함께 산장에 들어서자,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야니스와 라파엘이 반가이 맞아주었다. 산장에 놓인 열댓 개의 침대들은 한 치의 틈도 없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우리는 그 중 한구석에 나란히 누워 잤는데 야니스와 라파엘이 바깥쪽에, 나와 마테오는 안쪽에 자리를 잡았다. 숙소는 세계 각국에서 온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뤘고, 특히 독일 사람들이 많았다.



마테오와 야니스



친구들과 차를 마시며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던 중, 마테오와 야니스 사이에 또다시 말다툼이 벌어졌다. 다음 날의 기상 시간을 정하는데 있어 극명한 입장차가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마테오는 최대한 일찍 일어나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야니스는 '굳이 서두를 필요 없다'며 충분한 수면을 취한 뒤 출발해도 늦지 않다고 반박했다. 마테오는 자신의 의견을 관철하기 위해 산장 직원이나 다른 등산객들에게 출발 예정 시간을 물어보고 다녔는데, 모두 하나같이 “새벽 다섯 시”를 운운하며 가능한 한 일찍 길을 나서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산장까지 이어진 완만한 길과는 달리, 산장부터 꼭대기까지 향하는 길은 매우 험하고 가파른데다 기상 악화가 빈번하다고 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조언을 듣고서도 야니스는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등산은 빨리 가기 시합이 아니야. 난 아침에 잠을 좀 더 자고 싶다고!”


“야니스, 넌 열여덟 살이라 아직 모르나 본데……”     



언쟁이 종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흥분이 극에 달해 있던 마테오가 야니스의 어린 나이를 들먹이며 설득해 보려 했지만, “열여덟 살이라 모른다”는 말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야니스는 욕설을 내뱉으며 자리를 떠나 버렸다. 야니스가 없어진 것에 걱정을 표하는 내게, 마테오는 “이런 말다툼은 함께 여행할 때면 으레 일어나는 일”이라며 자신은 이런 논쟁을 피하지도,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해발고도 3천 미터가 넘는 싸늘한 곳에서 훌쩍 사라져 버린 야니스는 한 시간여 후에 숙소로 돌아왔다. 다행히도 두 친구의 흥분은 이미 가라앉아 있었고, 저녁 식사를 함께 들 때쯤엔 야니스가 저자세로 나왔다. 우리는 타협 끝에 새벽 여섯 시 반에 출발하기로 했다.  




저예산 여행의 의미     


산장에 짐을 풀자 급작스레 피곤이 몰려온 데다 온몸이 찝찝해 따뜻한 물로 씻고 싶었지만, 세면도구도 없을뿐더러 샤워 비용을 따로 내야 했기에 씻지 않고 버텼다. 야니스에게 돈을 빌려 숙박비를 낸 마당에 샤워까지 하는 건 사치였다. 그러나 피로보다도 더 나를 괴롭혔던 건 지끈지끈 머리를 덮쳐 온 두통이었다. 약 1,700m 지점에 있는 이므릴에서 출발했기 때문인지, 하루만 꼬박 걸었을 뿐인데도 벌써 지면에서 3천 미터가량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고산병에 대한 인식 자체가 없었던 나는 자꾸만 머리가 지끈거리고 토악질이 나오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이상하게 허리를 펼 수가 없어 등을 직각으로 굽히고 걸어야 했고, 그렇게 걸어 다닐 바엔 차라리 침대에서 몇 시간이고 휴식을 취하는 편이 나아 보였다.





숙소에서 쉬며 마테오와 잠잠히 이야기를 나누니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 마테오와 나 둘 다 저예산으로 여행을 하고 있기에 늘 돈 걱정을 하는 상황이었는데, 터놓고 보니 실제로 남은 돈이 거의 없었다. 늘 돈 걱정을 일삼던 나는 마테오에게 앞으로의 계획 그리고 필연적으로 닥쳐올 재정난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고, 그는 내게 “돈이 없더라도 어떻게든 여행을 해낼 수 있을 것”이라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여행하는 데 있어 돈이 필요한 건 당연하고 돈이 우리에게 큰 도움을 주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돈에 끌려가 버리면 안 돼. 나는 비록 저예산으로 여행하고 있어도 오히려 이를 계기로 내가 돈에 대해 가지고 있는 두려움을 떨쳐내고 싶어. 그게 이런 가난한 여행을 하는 목적이기도 하지.”     



늘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소중한 친구 마테오



돈이 없다는 이유로 지레 겁먹은 나머지 그와 같은 두려움으로 내 한계를 단정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해오던 차였기에, 마테오의 조언이 더욱 와닿았다. 내가 노동과 숙식을 교환하면서까지 어떻게든 여행을 연명하고 싶었던 이유도, 돈 앞에 무릎을 꿇고 싶지 않아서였다. 돈이 없다는 이유로 내가 다른 세상을 볼 수 있는 가능성을 닫고 싶지 않았다. 이번 여행을 계기로 ‘돈이 없어도’ 개의치 않고 세상을 당당히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배우고 싶었다.


돈이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주는 하나의 수단이 될 수는 있지만, 한 개인의 능력을 평가절하하거나 잠재력을 축소하는 역할을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이는 돈이 없는 것을 떳떳하게 여기라는 게 아니라, ‘돈이 없어도’ 떳떳할 수 있으며 다만 돈이라는 수단을 잘 이용해 윤택한 삶을 누리자는 것과 그 맥을 같이 한다. 돈이 목적이자 결과가 아니라 다만 수단에 지나지 않음을, 돈이 없어도 삶의 의미는 사라지지 않음을 저예산 여행을 통해 배우고 싶었다. (오히려 돈이나 관광, 미식에 연연하지 않다 보니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인 ‘사람’ 그 자체에 집중할 수 있었다.)





친구들과 오순도순 누워 잠을 청하는데, 머리가 지끈거리고 거동이 불편해 다음날 있을 산행이 걱정스러웠다. 친구들 역시 산장에 도착하자마자 병 걸린 닭처럼 골골대는 날 걱정하기 시작했고, 바로 옆에 누워 있던 라파엘은 카메라를 켜 동남아에서 직접 찍은 사진들을 보여 주며 여행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찝찝한 기분에 고산병까지 겹쳐 힘든 와중에서도, 친구들과 합심해 산장에 다다르는 데 성공한 것이 못내 기뻐 흡족한 마음으로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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