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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니나 Jul 29. 2021

북아프리카의 정상


전날의 완만함은 온데간데없이, 산장을 지난 후로는 정상까지 험한 길들이 이어졌다. 무엇보다 굉장히 가팔랐다. 잘 정비된 등산길은커녕, 발만 디뎠다 하면 우르르 쓸려 내려가는 모래와 돌멩이들밖에 보이지 않았다. 길을 잘못 드는 바람에 돌밭에 들어섰는데, 지반에 박혀 있지 않은 돌들이라 밟을 때마다 발이 미끄러졌다. 다른 등산객들처럼 제대로 된 등산용 신발을 갖춘 것도 아니었기에 오르는 데 시간이 걸렸다. 가뿐한 몸으로 뛰다시피 걸었던 전날과는 달리, 지독한 두통과 나빠진 몸 상태 때문에 빨리 걸을 수가 없었다. 역시 힘들었을 친구들은 끊임없이 나를 격려해 주며, 물을 아껴야 하는 상황에서도 나에게만은 아낌없이 내어주었다.




힘든 상황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던 친구들과 나



한계에 다다른 게 아닌지 자문해볼 정도로 힘이 들어 거친 신음이 터져 나올 무렵, 저 멀리 투브칼(Toubkal), 산맥의 정상이 보였다. 야니스와 마테오는 정상을 보자마자 앞뒤 재지 않고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우리 넷은 서로 얼싸안고 손을 맞잡으며 목표를 이루어냈음을 자축했다. 전날 산행에서 만났던 그리스 친구 루비는 우리가 도착하자마자 환하게 반기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같이 서 봐. 이 순간을 사진으로 남겨야지!” 사진 속 나는 얼굴이 퉁퉁 부어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지만, 그 누구보다 환하게 웃고 있었다.



북아프리카의 정상, 아틀라스 산맥의 투브칼 봉우리에서



햇볕이 따뜻하게 쬐는 정상에서 한 시간 정도 여유를 누렸다. 생전 처음 보는 풍경이 주는 웅장함에 압도되어 묵묵히 감상에 젖었다. 봉우리에는 삼각형 모양의 기념물이 세워져 있었고, 사방에는 깎아지른 돌산들이 아득하게 펼쳐져 있었다. 푸른 녹지로 뒤덮인 산에는 많이 올라 봤지만, 이처럼 돌과 모래로만 이루어진 산을 등반하는 건 처음이었다. 모로코에 발을 들일 때까지만 해도 북아프리카에서 제일 높은 곳에 올라서겠다는 어떠한 계획도 없었는데, 마음 맞는 친구들과 아틀라스 등반팀을 결성해 정상에 오른 걸 보니 ‘행복은 예기치 못한 곳에서 돌연 찾아온다’는 앙드레 지드의 말이 떠올랐다. 연신 환호성을 지르던 우리는 저마다 자리를 잡고 앉아 잠잠히 휴식을 취했다.



투브칼 산 정상(4,167m)에서



얼마간 쉬다 보니 슬슬 하산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사실 가파른 길은 올라가는 것보다 내려가는 게 훨씬 어렵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우르르 쏟아지는 돌멩이 더미에 미끄러지는 걸 각오하지 않고선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미끄러질 때마다 눈을 질끈 감던 것도 여러 번, 해탈한 마음으로 보드를 타듯 쓸려 내려갔다. 몸의 중심을 뒤로 두고 미끄러지면 잘 넘어지지 않았다. 운동화 옆면이 찢어져 발가락이 튀어나오고 이미 닳을 대로 닳은 바닥 때문인지 자꾸만 발을 헛디뎠다. 혹시 돌에 쓸려 내려가지 않을까 무서운 마음에 몸이 아픈 것도 모두 잊어버렸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 발을 크게 헛디디면 큰 사고가 날 수도 있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죽을 몸이다’ 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지기도 했지만, 위험한 길을 걷는 데 따른 죽음의 공포 그리고 이미 누적돼 있던 피로는 하산 길을 무척 힘들게 만들었다.



꽁꽁 얼어 있던 하산길



내려가다 떡하니 마주친 눈밭은 꽁꽁 얼어 있었다. 발을 잘못 디디면 그대로 밑바닥까지 미끄러져 내려갈 상황이었다. 대뜸 마테오가 눈밭에 온몸을 내던져 마치 썰매를 타는 것처럼 미끄러져 내려갔다. 실수가 아니었다. 환호성을 지르며 즐기고 있었다. 순식간에 눈밭을 통과한 마테오는 활짝 웃으며 망설이고 있는 우리더러 빨리 시도해 보라고 부추겼다. 나와 야니스, 라파엘은 잠시 주춤하다 한 명씩 미끄러져 내려가기 시작했다.     



눈밭을 미끄러져 내려가는 야니스



 ‘이왕 미끄러질 거 제대로 미끄러져 보자!’     


엉덩이가 무척 차가운 데다 삐죽 튀어나와 있는 돌 쪽으로 방향을 잘못 틀어 허벅지에 상처를 입긴 했지만, 끙끙대며 천천히 내려오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얼마 전까진 사막의 모래 언덕에서 굴렀는데, 이번엔 눈밭이구나. 같은 모로코의 서로 다른 지역에 불과한데도 만나는 풍경이 극과 극이다. 마미드에선 사막, 아틀라스에선 눈.


산장까지 어떻게 내려오는지 모르게 도착하고선 남은 식료품들로 허겁지겁 배를 채웠다. 마을 입구까지 가려면 서둘러 출발해야 했다. 산장에서 출발한 시각은 오후 세 시쯤으로 꽤 늦은 시간이었고 다들 두통을 느끼고 있어 걱정스러웠지만, 길이 그리 험하지 않아 네 시간여 만에 마을 입구에 도착했다. 고도가 낮아짐과 동시에 두통이 잦아들고 기력도 회복되었다. 피로로 침침했던 표정들이 한결 밝아졌다.     



오렌지를 좋아하던 염소들



라파엘은 장난기가 참 많았다. 그는 등반하는 도중 끊임없이 염소 울음소리를 냈는데, 신기하게도 근처에 있던 염소들이 그 소리에 반응했다. 산중에는 염소뿐만 아니라 노새도 있었는데, 이들은 등산객들의 짐을 나르는 용도로 산길을 오갔다. 라파엘은 넘치는 장난기를 주체하지 못하겠던지 길가에 흩뿌려진 노새의 배설물을 집어 들었다. 세상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처럼 보였고, 주먹밥처럼 크고 동그란 모양이었다. 라파엘은 배설물을 크게 한 움큼 집어 들더니 마치 눈싸움이라도 하는 것인 마냥 야니스 쪽으로 던졌다.


배설물이 몸에 닿진 않았으나 도를 넘어선 장난에 몹시 화가 난 야니스는 이성을 잃고 라파엘 쪽으로 다가왔다. 야니스는 들고 있던 등산스틱을 가로로 눕혀 라파엘의 엉덩이를 치고, 멈칫하여 자리에 멈춰선 라파엘의 어깨를 거칠게 밀었다. 라파엘은 야니스의 공격적인 대응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 장난이 네가 날 칠 정도까지는 심했던 건 아니다’ 라고 항변했다.



내내 의좋게 지내던 야니스와 라파엘이 하산길에 이르러 다투기 시작했다.



금세 잘못을 뉘우친 두 친구가 화해하는 것으로 사건은 종결되었지만, 하산 중턱에서 이토록 터무니없는 싸움이 벌어질 것이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둘은 싸운 직후에 곧바로 미안함을 느꼈는지 우리 모두에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굴었다. 야니스는 내게 “명상하는 염소를 본 적이 있냐”며 다정하게 물어 왔고, 라파엘은 계속 그래왔듯 염소 소리를 내며 산길을 걸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산길을 걷던 둘은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서로에게 사과를 건넸다. 멀찍이 서서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나와 마테오는 그제야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다 같이 킥킥대며 웃느라 진을 뺐다.


마을에 도착하자 목표를 이루어냈다는 기쁨이 강하게 밀려 왔다. 모로코에 도착하기 직전 스페인에서 장기 도보를 훈련해 놓은 덕분에, 장정 세 명과 발을 맞춰 무사히 4,167m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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