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틀라스(Atlas) 산을 향해 출발하기로 한 당일, 새벽에 일찍 일어나 씻은 뒤 미처 싸지 못한 짐들을 정리했다. 우리를 시외버스 터미널까지 데려다주기로 한 아브도('오해해서 미안해'편 참고)는 새벽 다섯 시가 되기도 전에 찾아와 짐 싸는 걸 묵묵히 도와주었다. 야니스와 마테오, 라파엘과 함께 마라케시(Marrakech)행 버스를 탔다. 마라케시에서 택시를 잡아, 고도 약 1,700m 지점이자 아틀라스산맥과 맞닿아 있는 고산 마을 이므릴(Imlil)로 이동할 작정이었다. 함께 지내는데 익숙해진 친구들과 여정을 함께한 덕에, 새로운 곳으로 향할 때도 마치 이미 가본 경험이 있는 사람처럼 평온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었다.
마미드(M'hamid)에서 버스로 약 열 시간을 달려 마라케시에 도착한 후 이므릴로 향할 택시를 물색하는데, 마테오와 야니스의 의견이 부딪쳤다. 마테오와 야니스는 둘 다 자기주장이 강한 데다 상대방에게 쉽게 굽히려 들지 않는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 지금까지는 서로 의견이 맞지 않는 경우가 드물어 사이좋게 지내왔다. 그러나 분위기를 보아하니, 이번에는 호락호락하게 넘어갈 눈치가 아니었다.
오랜 시간 버스 안에 있었으니 일단 근처에서 휴식을 취한 뒤 이므릴로 이동하고 싶었던 야니스와는 달리, 마테오와 라파엘은 마라케시에 도착하자마자 택시기사들과 가격 협상을 시작했다. 마테오가 목적지에 도착한 뒤에 쉬는 게 낫다며 야니스의 반발을 무시하자, 야니스는 화를 참지 못한 나머지 욕설을 내뱉으며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중간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던 나는 홀로 자리를 떠난 야니스를 뒤쫓았다. 야니스의 항변을 잠잠히 들어주며 달래는데, 마테오와 라파엘이 그새 협상을 끝냈는지 택시를 타고 우리를 데리러 왔다. 결국, 그들의 고집을 이기지 못한 야니스가 택시에 오르긴 하였으나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이므릴로 향하던 중 요기하기 위해 근처 시장에 내리자마자, 마테오와 야니스는 언성을 높였다. 그러나 한바탕 언쟁을 하며 감정을 털어내고 난 이후 야니스는 다시 화내지 않았다. 잠시 기분이 가라앉아 있을 뿐이었으나, 그나마도 금세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여행 시작부터 갈등이 생겨 내심 걱정스러웠지만, 막상 이므릴에 도착하자 다들 설렘에 어쩔 줄 몰라 갈등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어버렸다.
라파엘이 재빨리 예약해둔 덕에 저렴한 숙소에서 묵을 수 있었는데, 가는 길은 험했으나 내부는 무척 쾌적했다. 화장실을 사이에 둔 두 개의 열린 공간에 각각 1인용 침대 두 개와 2인용 침대 한 개가 있었다. 나와 야니스가 1인용 침대를, 마테오와 라파엘이 2인용 침대를 사용했다. 모로코 전통 요리인 타진(Tajin)을 맛보고선, 잠자리에 들기 직전까지 모여 앉아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다큐멘터리나 아랍 영화를 눈요기로 보며 대화를 나누었다. 소금물로 샤워를 하던 마미드의 흙집에 비하면 너무나 호화스러운 공간이었다.
폭풍우가 예정돼 있는 것을 감안하여, 이므릴에서 하루를 더 쉰 뒤 산행을 시작하기로 했다. 산 입구와 좀 더 가까운 숙소로 짐을 옮겼는데, 4인실을 이용했으나 투숙객이 우리밖에 없어 아늑했다. 다음 날 있을 등반도 준비할 겸 마을을 구경하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이므릴은 마미드와는 상반된 매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온통 나무가 울창하고 여기저기에 냇물이 흘렀다. 물이 무척 귀했던 사막 부근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하룻밤 사이에 극도로 뒤바뀐 풍경 탓인지 어리둥절한 기분이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우리는 상점을 돌아다니며 빵과 콩 통조림, 몇 가지 과일과 채소, 초콜릿, 치즈, 소시지 등을 샀다. 이틀간의 산행 동안 먹을 식량들이었다. 잠시 조용하다 싶었던 야니스와 마테오가 식료품을 구매하는 데에도 사사건건 부딪치는 바람에 수많은 언쟁이 오갔다. 이를테면 바나나를 산다면 몇 개를 사야 하는지, 지금 구매하는 양이 이틀 동안 먹기 충분한지 언쟁을 벌인 뒤에야 구매를 결정했다. 대강 짐작하여 거침없이 식료품을 구매하려는 마테오와는 달리, 야니스는 정확한 계량을 바탕으로 딱 필요한 만큼의 음식을 준비하는 것을 원했다. 언쟁의 빈도가 높아지다 보니 이젠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지쳐 멀거니 앉아만 있었다.
당시에는 친구들의 성격이 까다로운 탓으로 돌리며 어서 빨리 언쟁이 끝나길 기다리기만 했는데, 시간이 지나자 그러한 언쟁들이 있었기에 더욱 철저하고 꼼꼼한 구매가 가능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에는 ‘언쟁’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사실 언쟁보다는 친구들이 각자의 의견을 서슴없이 표현하며 보다 나은 방식으로 산행을 준비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었다. 친구들 역시 앙심을 품지 않은 채 서로 생각이 다를 수 있음을 받아들이는 한편, 자신의 의견이 관철되도록 노력할 뿐이었다. 즉, 이는 서로를 헐뜯고 깎아내리는 ‘싸움’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것이었다. 자기주장이 강하다 보니 서로 언성을 높일 때도 많았으나 이러한 과정이 감정싸움 또는 물리적인 폭력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언쟁을 피하려 늘 상대방의 의견을 위시했던 나의 모습과는 정반대라 낯설었지만, 때로는 무조건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보다 내 의견을 충분히 내는 것이 필요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나는, 내가 원하거나 주장하고 싶은 것이 있을 때 목소리를 내는 건 싸움을 일으키는 게 아니라 의견 조율을 위해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관문과도 같음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저 무조건 상대의 의견에 맞추려 했다. ‘아무거나 좋다’라고 답하는 게 대수가 아니며, 언쟁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주장을 피력할 수 있는 용기야말로 개개인이 독립적인 주체로 서기 위해 꼭 필요한 요소임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예상했던 것보다 많은 돈을 쓰게 될 것 같아 걱정스러운 한편 친구들이 티격태격하는 것에도 지쳐 조용히 있었더니, 마테오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고민을 말해주지 않으면 실망하겠다며 눈을 부라리는 마테오의 말은 이미 울적해진 기분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고, 그저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간절히 필요하다는 생각뿐이었다. 세 친구는 마침 유로 리그의 결승 경기를 생방송으로 시청하고 싶다며 근처 카페로 들어갔고, 썩 내키지 않았던 나는 홀로 마을을 산책했다. 물가를 산책하고,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돌아오니 답답했던 마음이 금세 풀어졌다. 역시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던 게 틀림없었다.
사람들과 부대끼며 여행하면 더욱 안전하고 활기차게 다닐 수 있지만, 홀로 마음을 정비하는 것보다 친구들의 일정에 발맞추는 데 집중하게 된다.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오로지 나 자신에게만 집중하길 원해 혼자 여행하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었지만, 이번 여정은 좀 달랐다. 늘 기꺼이 즐기던 고독이 증폭되어 더는 혼자 있고 싶지 않았다. 서로 알고 지낸 시간은 짧을망정 이미 충분히 많은 것들을 공유한 친구들과 함께라면 어디를 가든 좋을 것 같았다. 다른 문화권에서 온 친구들과 생활한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여행인지도 몰랐다. 홀로 산책을 하며 충분히 사색하고 나니 마음속 에너지가 충전되어 다시 원래의 쾌활함을 되찾을 수 있었고, 마침 축구 경기를 시청하고 나온 친구들과 만나 사이좋게 숙소로 돌아갔다.
아틀라스 등반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등반에 필요 없는 물건들은 모두 숙소 창고에 두고, 식량 및 필수품들만을 배낭에 담았다. 큰 배낭 세 개와 작은 배낭 한 개를 가져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