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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니나 Apr 04. 2021

예의에 대한 강박감


우리는 잠시 두 패로 갈라지기로 했다. 야니스와 마테오, 라파엘은 사막 깊숙한 곳으로 떠났고, 투어를 위한 여윳돈이 없었던 나는 라우라, 신티야와 함께 아흐마드의 사촌인 사이드의 집을 방문했다.



더욱 깊숙한 사막으로 떠난 친구들
아흐마드의 사촌인 사이드(오른쪽). 우리 또래 나이라 금방 친해졌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사이드네 가족은 마침 라마단(*)의 금식을 깨는 식사를 하는 중이었고, 우리를 위한 상을 따로 내어주었다. 사이드는 대추와 우유, 호박죽처럼 진득한 식감의 수프, 기름에 튀긴 밀전병 등 다양한 먹거리들을 권했다. (*) 라마단: 이슬람교에서 행하는 약 한 달가량의 금식기간으로, 이슬람교도들은 라마단 기간 중 해가 떠 있는 낮 시간에는 음식과 물을 먹지 않으며 해가 지면 금식을 중단한다. (출처: 시사상식사전)


식사를 마친 후 사이드의 가족들은 바닥에 깔린 양탄자에 누워 휴식을 취했고, 우리에게도 똑같이 쉬라고 권했다. 라우라와 신티야, 나는 집안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신티야는 신기하게도 얼마 전 야니스가 내게 했던 말을 똑같이 하기 시작했다.     



“‘용감하다’는 게 어떤 의미인 줄 알아? 다른 사람들이 패닉을 느낄 만한 상황을 두려워하지 않는 거야. 넌 정말 용감해.”      



마침 나 자신이 지닌 특성에 대해 골똘히 고민하고 있던 나는, 두 친구에게 조언을 구했다. 평소 나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는 호의를 동등한 수준으로 갚아 줄 자신이 없으면, 그러한 호의가 필요한 상황에서도 이를 피하거나 내쳐 버리곤 했다. 그러나 타인이 베푸는 호의를 수용하지 못하는 것과 별개로, 이 같은 행동이 과연 온당한 것인지에 대한 확신은 없었다. 라우라와 신티야는 마침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며 온화한 기색으로 조언을 시작했다. 먼저 그녀들은 내가 “지나치게” 예의 바르다는 것에 동의했다. 신티야가 이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수, 다른 사람의 호의를 받아들여. 누구든지 다른 사람을 도울 때면 기쁨을 느끼지 않겠어? 네가 그 호의를 거절하는 건 타인이 기쁨을 누릴 기회를 빼앗는 이기적인 행동일 지도 몰라. 너는 그들을 도우며 기쁨을 누리고 있으면서 말이야. 주는 것만큼 받는 것도 중요해.


네가 도움이 필요하다면, 도움을 요청하는 데 주저하지 마. 어려운 상황에서 호의를 거절하는 건, 망망대해를 혼자 조각배로 건너며 ‘신이시여, 저를 도와주세요’ 하고 있으면서, 정작 다른 사람이 다가와 도움을 주려고 하면 거절하는 것과 매한가지야. 은총과 축복을 거절하는 거지. 이건 ‘예의’를 차리는 게 아니라 이기적인 거야.”  


   

각각 페루와 스페인에서 온 신티야와 라우라



친절한 어조로 조언을 시작한 신티야는 나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얼마 전, 나는 무척 아팠음에도 불구하고 곁에 있는 친구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 약이 필요했지만 약이 있냐고 물어보지 않았고, 심지어 야니스와 라우라가 “약이 필요하냐”고 물었을 때조차 단호하게 “약을 원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결국, 내 상태를 헤아린 라우라가 여러 번 반복해서 권하고 나서야 약을 받았다. 열병이 도져 자리에 앓아눕고 나서야 비로소 그들의 호의를 수용한 것이었다. 당시 내가 친구들에게 약을 요청하지 않았던 이유는 다음과 같은 생각에 기반했다.     



‘친구들도 여행 중이니 분명 나처럼 아플 날이 올 거야. 언젠가 그 약이 꼭 필요한 날이 올지도 모르는데 내가 먹을 순 없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야니스에게 당시의 심정을 설명하자, 그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펄쩍 뛰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내 몫의 약이 충분히 있으니까 네게 권한 거지. 내가 여행하면서 약을 전부 먹는 건 아니잖아. 네게 나눠줄 만한 충분한 약이 있으니 네게 약이 필요하냐고 물어본 거고.”     



내게 귀중한 조언을 아끼지 않은 두 친구, 신티야와 라우라



그녀의 말처럼, 내게 도움을 베풀길 원하는 사람의 마음을 거절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나에겐 타인의 도움을 받으면 언젠가는 그 도움을 갚아 주어야 한다는 강박감이 존재했고, 그 때문에 타인에게 도움을 받아야 할 상황이 생기지 않도록 극도의 예의를 차리곤 했다. 평소 같았으면 ‘예의’라는 그럴듯한 단어로 포장되었겠지만, 신티야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이를 이기적인 행위로 칭했다. 늘 상냥하고 활발한 그녀의 말투는 어느새 단호한 어조로 바뀌어 있었다.      


신티야가 말한 대로 도움이 무척 필요해 보이는 친구가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고 극구 사양한다면 이를 바라보는 상대의 마음이 편치만은 않을 것이다. 아니, 도리어 더욱 불편해질 것이다. 예의를 차린다는 명목 아래, 받은 만큼 되돌려줘야 한다는 강박감으로 타인의 호의를 거절하는 것은 상황을 개선하고자 하는 상대방의 성의를 무시할 수 있는 행위였다. 그가 호의를 베풂으로써 누릴 수 있는 기쁨을 박탈해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한편으로, 이는 내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 데 익숙하지 않음을 드러내는 방증이었다. 나는 본래 모든 것을 혼자만의 힘으로 해결하려 드는 사람이었다. 어려움이 있어도 이를 쉽게 드러내려 하지 않았으며, 홀로 묵묵히 견뎌내는 것 말고는 다른 방도가 없다고 여겼다. 관점을 달리 한 그녀의 조언은 비합리적 편견에 사로잡혀 있던 나의 심경을 관통함으로써, 나약해지기 시작했던 마음을 단단히 붙들어 주었다. (‘때로는 도움을 요청하는 게 필요할 때가 있다.’ ‘모든 걸 혼자 해결하려고 하지 말자.’)     



라우라, 사이드, 신티야

     


이어 신티야는 ‘직감’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언제나 네 마음이 무엇을 원하는지 귀를 기울이고, 직감(instinct)에 따라 그대로 움직여. 다른 사람을 신경 쓸 필요는 없어. 오로지 네 마음이 원하는 대로 해.

     


선택의 갈림길에 섰을 때 이성보다는 직관, 즉 마음의 소리를 따르라는 말이었다. 이리저리 재보기 좋아하는 이성에만 신경을 쓰다 보면 직관의 외침을 놓치는 경우가 허다하나, 정작 우리의 삶에 중차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결정은 마음의 소리로부터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신티야의 말을 듣는 순간, 부족한 재정 상태를 걱정하는 이성의 아우성보다 여행을 멋지게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직관적인 확신에 눈을 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지금껏 내 여정을 영글게 한 것은 스쳐 지나가는 “순간들” 자체였다. 지난 과거에 미련을 품거나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는 건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불완전한 습성들이지만, 이와 같은 신기루에 휘말려 가장 중요한 현재를 놓쳐버리는 것만큼 안타까운 일은 없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관 지어 식료품 상인처럼 요모조모 계산하느라 또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느라 마음이 원하지 않는 행동을 실천하고 있노라면, 어느새 내 꿈과는 상반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친구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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