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연 세찬 모래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바람의 무게에 몸이 비틀거리고, 알이 굵은 모래들이 휘날려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몸 상태가 급작스레 나빠졌다. 기침하는 것까지야 예사로운 일이었으나, 열이 나고 온몸에 기운이 빠져 입에 먹을 것 하나 대지 못했다. 친구들은 내게 음식을 조금이라도 먹어야 한다고 채근했지만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상태는 점점 나빠졌고, 결국 아흐마드의 흙집에 꼼짝없이 누워 앓아야 했다.
이미 끓기 시작한 열은 모로코의 작열하는 태양 아래 그 정도가 더욱 심해졌다. 아흐마드와 친구들이 돌아가면서 나를 간호했다. 라파엘과 마테오는 내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끊임없이 방을 들락거렸고, 야니스는 껍질을 벗긴 오렌지를 곱게 잘라서 목감기약과 함께 가져왔다. 라우라는 여러 종류의 약을 챙겨 주었고, 신티야는 물에 적신 수건으로 얼굴과 몸을 꼼꼼히 닦아주고선 차가운 담요를 몸에 덮어 주었다. 아흐마드 역시 좀처럼 일어나지 못하는 날 멀끔히 내려다보며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스페인에 있을 때부터 몸이 보내고 있던 적신호를 내내 무시해 온 결과였다. 계획한 것을 해내는 데에만 몰두하느라, 몸 상태가 어떤지 돌아볼 겨를을 미처 내지 못했다.
다행히도, 세찬 모래바람이 잦아듦과 동시에 병세가 누그러졌다. 고요한 마음으로 사색에 잠기다 보니, 내가 심하게 앓았던 게 스트레스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앞으로 남은 여행이 잘 굴러갈 것인지, 부족한 돈은 어떻게 메울 것인지 끊임없이 ‘생각’하는 일은 그 자체로 심신을 피곤하게 만드는 일이기에, 이를 참다못한 몸이 내게 생각을 중단하라는 신호를 보내온 것이리라.
마음을 가장 무겁게 만들었던 건 돈이었다. 예산 문제로 나라 간 이동에 어려움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필요한 항공권들을 미리 준비해 두었고, 항공권을 구매한 후 남은 돈을 가지고 여행길에 나섰다. 실질적인 여행 경비는 터무니없이 적었으나 애초에 품은 계획대로 발을 내디뎠다. 별다른 생활비를 따로 책정하지 않은 채 출발한 나 자신에겐 이처럼 가엾도록 무모한 구석이 있었다. 현재 가지고 있는 예산으로 남은 여정을 버틸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서지 않을 때마다 무력감에 빠졌으며, 모로코에서 좋은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는 현재보다도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온 정신을 빼앗겼다. 의식적으로나마 두려움을 떨쳐내야 했다. 과거에도, 미래에도 연연하지 않고 그저 내가 이 순간 ‘살아서’ 온갖 것들을 경험하고 있음에 집중해야 했다.
우리들의 호스트 아흐마드는 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맞닥뜨릴 때나 대답할 게 마땅치 않을 때 늘 “사하라, 노 프로블럼(no problem)” 또는 “매직 사하라”라는 말로 얼렁뚱땅 넘어가곤 했다. 사하라에선 어떤 것이고 문제가 되지 않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으며, 사하라가 전해주는 마법 같은 기운이 문제를 해결해 준다는 것이다. 늘 비슷한 대답을 들어온 우리 역시 이에 세뇌되어 버렸는지, 아흐마드가 없을 때조차도 “매직 사하라”를 입에 달고 살았다. 점심으로 먹을 수프에 아흐마드가 기름을 치는 걸 본 야니스가 멀뚱멀뚱하며 “매직 사하라?”라고 묻는 것을 보고 한바탕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모든 것이 사하라에서 불어온 마법의 기운으로 변모한 것이다. 나 역시 호되게 열병을 앓고 난 이후로는 하잘것없는 생각들을 모두 내려놓은 채 “매직 사하라”의 기운을 굳게 믿어보기로 했다.
몸 상태는 한결 나아졌지만, 가라앉은 기분은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친구들과 함께해 즐겁던 기운도 사라져 버린 채 무력감에 빠져들었다. 모래바람이 세차게 불기 시작한 이후로는 작업을 멈추고 주로 실내에서 시간을 보냈다. 바람에 떠다니는 모래 알갱이의 입자가 커 야외 활동에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유로운 오후를 보내는 와중, 문득 라파엘이 내 쪽을 보더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라파엘은 이미 반년이 넘도록 동남아를 비롯한 여러 나라를 떠돌았으므로, 꽤 길게 여행하고 있는 셈이었다. 모로코를 끝으로 다시 프랑스로 돌아갈 그는 여행이 종료된 후 닥쳐올지 모르는 우울을 걱정하고 있었다. “우울의 시간이 끝나면 사람들은 오로지 여행을 하기 위해 돈을 벌기 시작한대.”
그와 이야기를 나누며,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여행이 종결된 후에 찾아올 감정에 대해 고찰했다. 여행을 지속하다 보면, 때때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있는 듯한 느낌이 들게 된다. 일기를 쓸 때처럼 의식적으로 날짜를 언급해야 하는 때가 아니라면 오늘이 며칠인지 또는 무슨 요일인지 도무지 궁금하지 않았기에, 마치 끝나지 않는 영겁의 흐름 위에 올라타 있는 것만 같았다. 공간에도 한계를 부여하지 않게 된다. 가정 또는 학교, 직장이라는 틀을 벗어난 지 오래였기에 안정된 공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데다, 익숙해지기라도 할라치면 금세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상황이 반복되기 때문이었다. 끊임없이 바뀌는 공간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초연한 태도가 필요했다.
그러나 난 바로 그러한 특성 때문에 여행이 좋았다. 비록 미정의 상태, 아직 닥쳐오지 않은 내일을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벗어날 순 없지만, 딱히 행로가 정해지지 않은 불안정은 그 자체로 마음의 근육을 단련시켰다. 모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이를 최대한 뒤로 미루고 싶었다. 편안한 곳에서 쉬고 싶은 욕망이 듦과 동시에, 아직은 미정의 상태를 벗어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공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