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지금 이 글을 쓰는 이유
사람은 모티베이션에 의해서 움직인다. 그런데 '반모티베이션'이라는게 있다. (이건 무슨 영어도 아니고 한국말도 아니고) 그것은 특정한 일을 너무 하기 싫어서 그 일 대신에 하는 일을 뜻한다.
기말고사 기간에는 그동안 거들떠도 안 보던 철학책을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붙잡고 있는 다던가, 원고 마감 전에 안 하던 플스를 괜히 켜서 어설픈 인공지능에게 두드려 맞는데도 즐겁다던가 하는 것 말이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의지력의 하나의 형태인 모티베이션 강요하며 살아왔다. 오죽하면 리더의 덕목에 직원에게 모티베이션을 잘 줄 수 있는 능력이 들어가겠냐는 말이다.
사실 이러한 방식의 진보는 진화생물학적으로 볼 때도 자연스럽지가 않다. 우리는 무엇을 이겨내고 하기 싫은 일을 넘어서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현실에 순응하고 변화에 적응하게 만들어졌다.
그렇다. 인간은 원래 스스로 변화하게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혁신을 이토록 부르짖는 이유는 무언인가? 이런 게 실제로 가능하기는 한 건가?
실제로 우리는 혁신이란 걸 해본 적은 있을까? 아니다. 그런 적 없다. 혁신이라는 이름에 적응을 하고 있을 뿐이다. 미지의 커다란 파고에 살아남고자 하는 적응. 그게 우리의 삶의 모티베이션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반모티베이션'이다.
정리하면 인간이 생물학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그동안 그토록 노력했던 '적응'의 정체는 '반모티베이션'이고, 이를 효과적으로 이용하면 우리는 보다 자연스럽게 창조하고, 보다 자연스럽게 목표를 이룰 수 있다.
그래서 배고픈 소크라테스는 생각하고, 헝그리 한 히딩크는 승리를 갈구하며, 배고픈 우리는 오늘도 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