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삼남매의 맏이로 태어나 부모님은 물론 할아버지, 할머니께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 내가 태어났을 때 우리 가족은 과수원을 하며 산 속 집에 살고 있었는데, 적막했던 산생활을 깨뜨린 첫 손주의 웃음소리 그리고 울음소리마저도 그토록 사랑스러웠다고 한다. 이불에 뉘여 질 틈 없이 늘 누군가의 품에 안겨있었고 서울을 가봐도 나처럼 예쁜 아기가 없었다는 말을 아직까지 하실 정도이다.
내가 4살 무렵 읍내에 내려왔다가 다시 과수원에 올라갈 때면 하도 울어서 우리 집은 읍내로 이사를 했다. 그러다 12살 때 부모님이 가게를 시작하시면서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 손에 자랐다. 다니던 중학교가 걸어가기엔 꽤 멀었는데 지각한 날에는 아침 늦게까지 주무시는 부모님 대신에 할아버지께서 오토바이로 태워다주셨다. 한 끼라도 밥과 국을 안 먹으면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아시는 할머니는 한참 잘 먹는 세 손주를 먹이시느라 늘 바쁘셨다.
덕분에 나는 부모님이 휴일 없이 늘 바쁘셨어도 빈 자리를 크게 모르고 자랐다. 할아버지, 할머니에 대한 마음도 각별해서 손톱, 발톱도 다 내가 깎아드리고 할아버지, 할머니 방에서 잘 때도 많았다.
그런 내가 서울에 있는 사범대에 떡 하니 붙었을 때 제일 기뻐하신 분들이 바로 할아버지, 할머니셨다. 우리 손녀 선생님 된다고 경로당에 한 턱 쏘시고, 첫 학기 등록금을 내어주셨다. 그게 그분들의 기쁨이고 자랑이었다. 하지만 나는 선생님이 되려는 생각은 별로 없었다. 대학졸업 무렵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에 대해 숙고한 뒤 내린 결론은 임용고시가 아닌 독일유학이었다. 게다가 당시 사귀고 있었던 음악을 전공하는 남편과 결혼해서 유학을 가겠다고 했으니 부모님과 할아버지, 할머니의 충격은 정말 컸다.
3월에 독일로 가는 비행기를 예약해놨는데 1월까지도 결혼을 허락해주지 않으시다가 2월 초에 부모님이 허락이라기보다 포기를 하셨다. 할머니는 결혼식도 안 오시겠다고 하셨지만, 온 가족이 설득해서 오시긴 하셨다. 그 과정에서 내 마음도 상처를 입었다. 나에 대한 기대가 크셨던 건 이해하지만, 내가 그 분들이 원하는 대로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건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한국에 돌아와서 아이를 키우는 동안에도 할머니는 아이들은 기관에 맡기고 무조건 임용시험만 보라고 하시고, 돈도 못 번다고 면박만 주셨다. 연락할 때마다 스트레스만 받으니 전화 드리는 횟수도 점점 뜸해졌다. 그리고 내 안에는 점점 이런 생각이 싹 텄다. '아기 때 예뻐하는 건 누가 못 하겠어. 아기는 다 사랑스럽지. 진짜 사랑한다면 내가 선생님이 안 되고, 돈을 못 벌어도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해주셔야 하는 게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면서 내가 기억도 못 하는 그 시절, 나에게 주셨던 사랑마저 깎아내렸다.
그러던 중 올해 초 셋째를 가지게 됐다. 남편이 주말에도 일을 하니 혼자서 다섯 살, 세 살 두 아이를 보기가 버거워 차로 20분 정도 걸리는 시댁에 자주 간다. 내가 힘들어 누워있어도 아버님과 어머님께서 살뜰히 애들을 봐주신다.
밤 늦도록 안 자고 징징댈 때도 짜증 한 번 내시는 법이 없고, 오래도록 업고서 마당일도 다 하신다. 애들이 묵을 잘 먹는다 하면 가을 내내 도토리를 주워다 쟁이시고, 물놀이를 하고 싶다하면 바리바리 싸서 계곡으로 출발하신다. 실수로 티비를 부셔도 큰소리 내시는 법이 없다.
아이들을 향한 시부모님의 사랑을 보면서 나에게 손주가 생긴들 저렇게 사랑해줄 수 있을까 싶고 문득문득 나도 아기 때 이런 사랑을 받았겠구나 싶어서 감동이 될 때가 있다. 규칙과 절제도 가르쳐야 하는 부모와 달리 그저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시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셨던 것이 축복이었음을 이제야 느낀다. 내가 기억하진 못 해도 그 '사랑받는 느낌'은 내 영혼에 깊이 각인되어 세상을 살아갈 힘이 되었을 테니까.
아무리 사랑스러운 아기고, 어린 손녀라도 참 힘들고 지치게 할 때가 있는데 그분들은 사랑으로 참고 품어주셨던 거였다. 아기 때 주셨던 그 사랑은 당연하고, 쉬운 것이 아니었다. 진정한 사랑이 아니었다고 단정했던 그 마음은 그저 다른 형태의 사랑이었을 뿐이다.
물론 아기 때 주어야 하는 사랑이 다르고, 청소년기에 주어야 하는 사랑이 다르고, 어른이 된 자녀를 향한 사랑은 또 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초보엄마인 나는 아이가 크는 만큼 사랑의 크기도 방식도 발전하고 변화해야 하는 것이라고, 그저 막연하게 느낄 뿐이다. 시기마다, 아이들마다 필요한 모습의 사랑을 줄 수 있는 그런 엄마가 되고 싶다.
부모의 사랑이 변하듯 반대로 부모님과 할아버지, 할머니에 대한 나의 사랑도 달라졌다. 대학교 때까지는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지받는 자리에 있었지만, 이제는 나도 가정을 이루었고 세 아이의 엄마가 되어 조금이나마 부모님의 심정과 삶의 무게를 헤아리게 되었다. 용돈도 드리고, 삭신의 '통증'과 '늙음'의 서러움으로 푸념하실 때 처음 듣는 것 마냥 들어드린다. 어디가 아프시다고 하면 예사말로 듣지 않고, 내 아이가 아프다는 말에 반응하듯 귀 기울인다.
또한 어렸을 때는 나의 입장만 헤아려 주시길 바랐지만, 이제는 부모님과 조부모님의 생각을 이해하려고 더욱 노력한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젊은 시절 너무나도 가난하셨다. 빚을 내서 산을 산 뒤 나무를 다 잘라내고 거기에 사과나무, 복숭아나무를 심어 과수원을 만드셨다. 광목밀가루포대를 잘라 아기 기저귀로 쓰셨다. 그 고생을 겪으신 분들에게 선생님이 되서 경제적으로 풍족하고 안정하게 살 기회를 내버린 나는 당연히 어리석기 짝이 없는 사람이다. 부모님 세대는 그나마 미디어의 영향으로 하고 싶은 걸 하며 살아야 하는 우리 세대를 이해하시지만, 절대적인 가난을 몸으로 뚫고 살아오신 조부모님 세대에 그런 이해를 바라는 건 오히려 죄송스런 일인 듯하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여전히 내가 선생님이 되지 않고 집에서 애만 보는 걸 못마땅해 하신다. 하지만 내가 용돈을 드릴 때보다 증손주들이 오랜 만에 봤는데도 낯 안 가리고 제자리마냥 덥석 무릎에 앉을 때 훨씬 더 기뻐하신다. 그 모습에 내 사진첩에서 나를 안고 웃으시던 젊은 할아버지, 할머니의 모습이 겹쳐진다. 그분들이 원하는 대로 살지는 않지만, 내가 선택한 삶을 행복하게 살아내는 것이 두 분께 작은 기쁨이라도 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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