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스마트폰을 사용하기 시작한 건 2014년 첫째가 태어나면서부터다. 그전까지는 독일에 살면서 카메라도 없는 2G폰을 사용했었다. 스마트폰으로 사진도 찍을 수 있고, 카톡으로 아이 사진을 보내서 가족, 친구들과 이야기도 나눌 수 있고 또 필요할 때 컴퓨터를 켜지 않고 바로 육아정보를 검색할 수 있어서 편했다. 지역맘 카페에 가입하고는 '팔아요 게시판'과 '드려요 게시판'에 필요한 아이 물건 키워드를 등록해놓고 알람이 뜨면 바로 댓글을 달아 줄을 섰다. 그렇게 해서 아이 옷과 신발, 천기저귀, 책, 둘째 아기침대 등등 정말 많은 물건을 물려받아서 경제적으로 큰 보탬이 됐다.
또 밤중수유할 때나 아이가 막 잠에 든 뒤 깊은 잠에 들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에도 스마트폰을 많이 봤다. 포털사이트 메인의 볼만한 글이나 기사 혹은 책, 영화, 드라마 리뷰를 즐겨 읽었는데 읽다보면 그나마 길고 긴 밤수 시간이 훅 지나갔다.
셋째 돌까지는 애들 키우면서 달리 스트레스 해소할 길도 없으니 스마트폰을 보는 시간이 꽤 긴 걸 알았지만 그 시간을 줄일 생각도 하지 않았다. 나름 꼭 필요한 때만 사용한다고 착각하고 살았다. 몸은 아이들과 집에 있지만, 스마트폰이 나를 잠시나마 다른 곳으로 데려다주는 게 좋았다. 물론 다시 돌아왔을 때 내 손에 남은 건 없지만 말이다. 하지만 셋째 돌이 지난 후 이유식과 수유에 들이던 시간이 사라졌는데도 그 시간이 내게 돌아오지 않는다고 느껴졌다. 여전히 글쓰기와 운동에 쓸 시간이 없었다. 시간도둑을 잡아야했다. 그렇게 스마트폰과 나의 시간을 둘러싼 싸움이 시작되었다.
앱스토어에서 '넌 얼마나 쓰니'라는 가슴을 뜨끔하게 만드는 이름의 어플을 다운받았다. 이 어플에는 휴대폰 잠금 기능이 있는데 처음에는 잠근다는 생각은 차마 하지도 못했다. 두 달 정도는 어플을 매일 사용시간을 확인하는 용도로만 사용했다. 별로 한 일도 없는 것 같은데 매일, 아주 꾸준히 2시간씩 사용하고 있었다. 이 때 마침 영어 공부한다고 열심히 듣기 시작한 유튜브도 한 몫을 했고, 화장실 갈 때 3분, 아이들 잘 놀 때 3분 짬짬이 쌓인 시간이 2시간이나 됐다. 스마트폰을 자주 다니는 길목이 아닌 거실 구석이나 방에 두기도 하고, 스스로 사용시간을 정해보기도 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자발적인 통제는 스마트폰을 향한 더욱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접근으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다.
원인이 카톡인가 싶어서 특단의 조치로 카톡 사용시간만 10분으로 제한했다. 그리고 가족단톡방을 제외한 다른 단톡방에서 나왔고 PC로만 카톡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알람을 꺼두었어도 숫자가 써진 작은 빨간 동그라미가 떠있으면 나의 손이 뇌가 명령하기 이전에 그 방에 들어가 빨강 동그라미를 없애고야 마는 게 싫었다. 하지만 카톡 시간을 제한했는데도 스마트폰 사용시간에는 변화가 별로 없었다.
결국에는 최후의 수단으로 휴대폰 전체에 하루 사용시간 20분 제한을 걸었다. 이 어플을 깔면 매일 하나의 명언이 뜨는데 그 날은 독일의 소설가 장 폴 리히터의 명언, '행동만이 삶에 힘을 주고 절제만이 삶에 매력을 더해준다'는 문장이 떠있었다. 그동안 충분히 나 스스로 절제할 수 없음을 확인했으니, 이제는 어플이 나를 절제시켜줄 수 있는지 실험해 봐야 했다. 한 번 잠그면 영원히 잠기는 것도 아니고, 며칠만 사용해보자는 가벼운 기분으로 잠금 기능을 걸었다. 하지만 그 날이 하필 친구네 첫 아이를 보러 가기로 한 날이었다. 휴대폰으로 내비게이션을 보고 가야하는데 스마트폰 잠금이 걸려있으니 사용할 수 있는 어플이 전화와 문자뿐이었다. 다행히 문자에 남겨진 주소가 있어서 30분이나 늦긴 했지만 잘 도착할 수 있었다.
다음날 20분 사용시간에 제일 먼저 내비게이션과 연락처 어플을 잠금 화면에서도 열 수 있는 어플로 허용해놓았다. 하다 보니 카메라, 사진을 볼 수 있는 갤러리, 음악, 은행, 성경, 알람, 미세먼지어플, 백색소음어플, 육아일기어플, 도서관 어플이 다 사용가능어플로 나오게 되었다. 사실상 카톡과 유튜브, 인터넷을 빼놓고 새살림을 차린 셈이다.
이렇게 몇 달을 살았지만 아직도 화장실 갈 때나 셋째를 업어서 낮잠을 재울 때 자연스럽게 스마트폰을 찾을 때가 많다. 화면을 켜봤자 재미있는 어플은 하나도 쓸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시무룩해진다. 정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을 하고 싶으면 도서관 어플에 들어가서 전자책을 구경한다. 인터넷서점어플도 사용가능어플로 풀어놨었는데 정말 책보다 더 탐독해서 결국 뺄 수밖에 없었다.
유튜브도 영어공부를 위해 사용가능 어플에 두고 자주 사용했었다. 한 문장씩 들려주고 입으로 직접 반복해보는 영상들을 자주 틀어놓고 따라하니 이제는 진짜 영어가 될 것 같고, 입으로 하는 영어는 해본 적이 없어서 정말 재미있었다. 하지만 나를 나보다 더 잘 아는 유튜브가 요즘 인기 있는 드라마 하이라이트나 '동기 부여를 원한다면 꼭 봐야할 영상'이라며 메인에 띄워주니 그걸 안 누르고 지나갈 재간이 없었다.
동기부여 영상 보느라 할 일을 못하고, 엄마표 영어 영상 보느라 책 읽어달라는 애들을 계속 기다리게 하는 황당한 시추에이션이 반복되다보니 유튜브와의 슬픈 이별을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꼭 봐야하는 거라면 컴퓨터를 켜서라도 보겠지 싶어서 결국 사용가능 어플에서 빼버렸다. 삭제해보니 확실히 그간 안 봐도 되는 것들을 보고 있었다는 게 드러났다.
스마트폰을 절제할 이유를 찾기 위해 스마트폰의 해악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면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자기 전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것만큼 자고 일어나자마자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것 역시 좋지 않다는 점이다. 밤새 온 메시지에 응답하거나 기사를 읽는 일처럼 즉각적인 일처리를 마치면 뇌에서 도파민이 분비되어 무언가 성취하고 보상받았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면 뇌는 쉽게 도파민 분비를 일으키는 행동을 반복하게 한다.
그래서 아침에 가장 먼저 스마트폰을 하면 빠르고 쉽게 기분이 좋아지는 그 행위를 하루 종일 반복할 가능성이 더 높아지고, 반대로 정작 해야 할 일은 더 재미없게 느껴지고 하기 싫어진다. 이를 안 뒤 새벽에 일어나 작업하는 4시에서 7시까지도 스마트폰 잠금을 해두었다. 커피를 끓이고 마시는 동안 습관처럼 스마트폰을 보다가 작업을 시작했는데, 5분이라도 잠을 포기하고 얻은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스마트폰을 잠근 뒤 그 시간에 딱히 뭘 더하게 됐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마땅히 그 시간이 흘러가야할 곳으로 흘러갔으리라. 화장실에서 더 금방 나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셋째 얼굴 한 번 더 봤을 것이고, 하루 5분이면 쓰는데도 며칠씩 밀리던 일기도 좀 덜 밀리게 됐고, 읽으려고 펴놓은 원서도 한 쪽은 더 읽었을 것이다.
스마트폰에 내가 꼭 알아야할 내용, 최신 정보가 들어있다 생각해서 그것으로 나를 가득 채웠을 때 내게 느껴지는 건 딱 그 작은 화면만큼의 지적, 감정적 만족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 것도 보지 않고, 아무 것도 듣지 않을 자유를 누린다. 스마트폰이 생각하게 하는 내용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고요히 떠오르는 아이디어들을 따라다닌다. 그리고 내가 진정 하고 싶은 일, 그래서 해야만 하는 일을 했을 때만 오는 영혼의 만족을 더욱 자주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