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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는사람소소 Jul 14. 2021

I just called to say I LoveYou

 다른 사람들보다 유난히 잘 맞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 사이의 어울림은 부모 자식 간에도 존재한다. 나에게는 엄마가 그렇다. 물론 엄마의 인격은 나의 인격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지만, 내향적인 기질이나 책 읽고 글쓰기를 좋아하는 점이 비슷하다. 카레도 절대 비벼먹지 않고 밥에 얹어 떠먹는 점까지 닮았다. 엄마로 만나지 않았더라도, 다른 곳에서 또래로 만났더라도 자주 연락해서 만나는 좋은 친구가 되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아빠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구석이 더 많았다. 그는 가족만큼이나 술과 화투와 친구를 사랑하는, 전형적인 시골아저씨이다. 다른 곳에서 마주쳤다면 너무 달라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그의 딸로 태어난 덕택에 그와 나는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가 될 수 있었다.






 부모님은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지방 소읍에서 갈빗집을 하셨다. 막 외식문화가 활성화되던 시기라 가게는 늘 바빴고 나와 두 동생들은 가게일을 돕는 날이 많았다. 10시 반 정도에 가게 문을 닫고 집에서 탕수육이나 치킨을 시켜 먹거나 마늘짱아치가 맛있던 감자탕 집에서 늦은 저녁을 먹는 게 가게일을 돕는 재미였다. 손님 중에는 부모님의 친구나 지인이 많았기 때문에 나는 아빠의 친구들을 다 알았고, 아빠의 술주정도 잘 알고, 오늘은 화투에서 얼마를 땄는지도 알았다. 더불어 매일 어마어마한 양의 상추와 파를 씻어내고, 까맣게 탄 불판을 손으로 꼭 잡고 수십 개씩 닦아내느라 물에 불고 벌게진 손가락도 마디마디 잘 알았다.




 한 달에 2, 3번은 가게 일이 끝나고 옆 도시에 있는 본점으로 고기를 사러 가야했다. 피곤하신 엄마를 먼저 집에 내려드리고 아빠와 나는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1시간을 달렸다. 가게에서 늘 자주 시간을 보내서인지 아빠와 단둘이 있는 시간이, 대화가 어색하거나 어렵지 않았다. 나를 그를 좋아했고, 그 시간이 좋았다.




 아빠와의 그 데이트 시간은 대학교 4학년까지 지속됐다. 어느 날은 점심 장사가 일찍 끝나서 한낮에 아빠와 옆 도시로 향했다. 한밤중에는 화려한 조명과 가로등에 가려졌던, 쇠락한 소도시의 모습이 낯의 햇빛 속에 여실히 드러났다. 마치 어느 날 갑자기 발견한 부모님의 주름처럼. 왠지 정겹기도 하고 애잔하기도 했다. 도시의 늙음을 보던 나와는 달리 아빠는 새 것을 보고 있었다. “저 차 좀 봐봐.” 아빠가 가리킨 쪽에는 하얗고, 뒷부분이 네모나고 앞부분이 조금 튀어나온 귀여운 흰색 자동차가 있었다. “저게 새로 나온 차라는데 나중에 우리 딸들 저런 차 사줘야겠다.” 아빠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듯, 어린애처럼 웃고 계셨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당시 4년째 교제 중이던 남편과 결혼해서 유학을 가겠다고 했다. 내 이야기라면 언제나 귀담아 들으시던 부모님이지만 클래식음악을 전공하는 남자친구에 대한 이야기라면 언제나 나중으로 미루셨다. 하지만 그 때가 아니면 또 몇 년 뒤가 될지 몰라 나는 진지한 마음을 담아 편지를 썼다. 두 분은 마지못해 허락하셨지만 결혼식 사진에서 보여지듯 철없는 맏딸만 헤벌쭉 웃고 있고 두 분의 얼굴에는 만감이 교차했다. 예상보다 너무 빨리, 너무 먼 곳으로 첫 딸을 보내야 하는 그 심정을 나는 나중에야 사진에서 읽어냈다.




 내가 독일에 온지 얼마 안 되어 부모님은 가게를 접으시고 아빠만 택시기사로 일을 시작하셨다. 온 가족의 일상을 묶어놓던 가게였던지라 속이 시원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나의 결혼이 왠지 모르게 부모님의 삶의 불꽃을 꺼버린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내가 독일에서 유학생으로, 새댁으로 새로운 생활에 적응할 동안 아빠 역시 새내기 택시 기사로의 삶을 시작하셨다. 아빠는 원래 운전을 좋아하셔서 버스 기사를 하고 싶으시다던 말씀도 하셨었기에 나는 택시 기사의 생활도 비슷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택시 기사는 야간이 있어서 밤새서 일을 해야 하는 경우가 꽤 있어서 내심 걱정이 되긴 했다.






 한국에서는 모내기가 한창이고, 독일에서는 뒤늦게 봄 같은 봄이 시작되는 6월 초였다. 아빠 목소리가 듣고 싶어 한국 시간으로 밤 11시쯤 전화를 드렸다. 인터넷 전화기를 통해 들리는 소음으로 가늠해보건대 아빠는 한적한 도로변에 계신 것 같았다. 어디 계시냐고 여쭈니, 손님을 태워다 드리러 1시간 반 떨어진 거리의 용인시에 와계신다고 했다. 돌아가기 전에 잠시 편의점에서 커피를 마시며 쉬고 계신 중이었다. 나는 먼 길을 다시 운전해서 돌아가야 할 아빠가 걱정되었지만 아빠는 큰돈을 벌어서인지 신이 나 계셨다. “우리 딸 무슨 일로 전화했나?” 물으셨는데 “응? 그냥. 사랑한다고 말하려고.”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스티비 원더의 유명한 자작곡 제목과 같은 그 말이 어쩌다 튀어나왔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감정 표현에는 서툰, 무뚝뚝한 큰딸이었기에 내가 말해놓고도 좀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결혼하고 유학길에 오르려 갔던 공항에서 엄마가 아빠가 너무 쓸쓸해 보인다고 손 좀 잡아주라 해도 왠지 쑥스러워 잡지 못했던 나였는데. 어쩌면 아빠가 긴 시간을 운전해서 돌아갈 동안 아빠의 몸과 마음을 꼭 붙잡아 줄 그런 말이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반대로 그 말은 그 이후 10년 동안 아빠를 향한 나의 그리움을 붙들어주는 말이 되었다.




 며칠 뒤 남편이 이른 새벽에 자는 나를 깨웠다. 아빠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급성심근경색증. 바로 비행기를 타고 돌아가보니 공항에서 잡아주지 못했던 아빠의 손은 이제 차가워져 있었다. 그 무엇도 위로가 될 수 없었지만, 나도 미리 알았던 것처럼 아빠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했다는 것만이 참 다행이었다.





 어느덧 십년의 세월이 지난 작년 말, 눈 오는 저녁이었다. 그 사이 나는 세 아이가 엄마가 되었고, 여동생도 결혼을 해서 우리집 가까운 곳에 신혼집을 차렸다. 여동생이 넷째를 품고 입덧으로 고생 중인 나에게 저녁을 차려준다기에 ‘1+3’으로 붙어 다니는 삼남매과 여동생네로 향했다. 저녁을 먹고 집에 가려고 지하 주차장에 내려오니 새해부터는 운전을 해서 직장이 있는 고향으로 출퇴근하려고 차를 샀다고 했다. 동생이 손으로 가리킨 곳에는 새하얀 ‘레이’가 서 있었다. 아빠가 딸들이 타고 다니던 모습을 보았던, 그 작고 앙증맞은 차. 동생과 제부는 연말 내내 연습을 했고, 동생은 레이를 타고 새해 첫 출근에 성공했다. 아빠가 그토록 사랑했던 둘째딸이, 아빠가 딸들에게 사주고 싶어했던 그 레이를 타고, 아빠가 누비던 그 길들을 달리고 있었다. 아빠가 살아계셨다면 사소해서 당연했을 그 일들을 죽음은  이토록 가슴 시리도록 특별한 일로 만드는 재주가 있다.





 아빠가 떠난 지 1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여전히 진한 그리움으로 가끔, 아니 사실은 아주 자주 아빠를 본다. 거울을 볼 때는 아빠를 닮아 쌍꺼풀도 없고 얼굴이 까무잡잡한 내 얼굴에서 어릴 적 나를 안고 계시던 30대의 젊은 아빠의 얼굴이 비친다. 중간중간 욕을 섞어 말하는 남동생의 말투에서, 더러 들리는 고향 터미널 앞 아빠가 나를 태우러 나와 차를 세우고 기다리시던 그 자리에서도. 그리고 어버이날에 외할머니 드릴 카네이션을 접으며 외할아버지 카네이션은 산소에 갖다드리겠다는 둘째 딸의 쌍꺼풀 없이도 예쁜 그 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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