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쑤우 Jul 06. 2021

메일에 숨은 진실.

긴 메일은 불같이 번진다.

 출근해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메일 확인이다. 컬러 보드를 만들거나 프린트 등을 수정 하는 일이 많아서 혼자 일하는 시간도 많은 편이긴 하지만, 상품이 잘 나오려면 부서간 혹은 파트너사와의 협력이 중요하다. 파트너사들은 해외에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원활한 업무와 기록을 위해 메일로 소통을 주로 한다.


 하루에 오고 가는 메일의 양은 수백통. 메일만 보다 하루가 다 갈 것 같다고 생각하겠지만, 전부 나에게 오는 메일이 아니라, 내가 직접 해결하지 않아도 될 일임에도 참고를 위해 참조인으로 들어가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도 모두 휘리릭 읽어는 보기 때문에 대부분의 동료들은 짧고 명료한 메일을 좋아한다.


 오늘 파트너사의 S로부터 A4 용지 한바닥은 될 것 같은 길이의 메일을 받았다.

‘뭐지?’


 내 앞으로 왔는데, 바이어를 포함한 이 라인의 거의 모든 스텝들이 참조인이라 의아했다.


 큰일은 아니다.


 염색 업체에서 전달 될 샘플이 원하는 컬러가 안 나온다는 것이다.

컬러가 안 나오게 된 기술적인 한계부터 시작해서 여러 상황과 이유를 쭈~욱 나열한 메일이다.


 제조 기업에서 일할 때 조색 현장 업무를 주기적으로 한 적이 있다. 공장과 상품 컬러 개발 업무 간의 괴리를 줄이기 위한 조치였는데, 컬러 공정과 작업 현장의 고충도 잘 이해 할 수 있게 하였다. 그렇기에 어떤 마음으로 이 메일을 써 보냈는지 충분히 안다.


 이 컬러가 딱 맞게 안나오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이번까지도 안되면 가능한 범위 내 옵션 중 선택하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매니저가 한숨을 쉰다.

“무슨 일 있어?”

“S가 보낸 메일 봤어?”

“응, 그거 오늘 하나 골라서 선택하려고 하던 거야. 걱정할 거 없어.”

“과연…”



띵~

출근 한 바이어 B에게 연락이 왔다.

이 긴 메일이 왜 왔는지, 무슨 일이 어떻게 진행 되고 있는건지 알아야겠다는 것이다.


 알고 보니 S는 이런 긴 메일을 종종 써서 보내는 모양이다.

한국에서 일할 때, 나는 긴 메일을 일목요연하게 써서 보낼 수 있는 것도 능력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여기서는 다르게 생각하고 있었다.


 메일이 길다는 것은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인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관심 없었던 모든 부서에서 달려오기 시작한다.

특히 높은 직급이 참조로 들어갈 수록, 사건은 불덩이처럼 순식간에 커져버렸다.


 별일 아닌 것도 완전 큰 일이 되어서 혼자 처리하고 넘겨버릴 수 있었던 일도, 모두가 모여서 논의 후 처리해야 하는 일이 되 버린다.


 S는 아마 최상위 파워 바이어 B를 넣어서 그 선에서 당장 해결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그녀는 브랜드 내부의 커뮤니케이션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몰랐던 것 같다.


 미팅이 소집 되었고, 나를 포함한 관련 스텝들이 모두 끌려왔다.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바꿀 수 있는 시간도 없고, 이 패브릭에서는 이정도 색이 베스트야. 예쁘게 나온 편이니 그냥 이대로 하자.”

B가 머천트 팀을 보며 물었다.

“진짜 다시 할 수 없는 거야?”


 옷은 스토어에 들어가서 팔려야 하는 타이밍이 있기 때문에 시간이 중요하다. 여름옷을 기획했는데, 완벽하게 만든다고 가을 직전에 스토어에 들어가면 안 만든 것보다 못하다. 게다가 미국 로컬 생산보다 세계 곳곳의 생산지에서 배로 실어오기때문에 선적 타이밍을 놓치면 큰 손실이 발생 할 수 있다.


“컬러리스트가 괜찮다고 하는 정도의 컬러라면 판매에 문제가 없을 거야.”

머천트 팀이 애써 B를 달랜다.

나도 고개를 계속 끄덕였다.

같이 코디 될 아이템들이 모두 끌려 나온 후에야, B가 납득했다.



아~~~ 벌써 4시다.

다들 지쳤다.

집에 빨리 가려면 지금 다른 일 여러 건을 처리했어야 할 시간인데 왜 다들 S에 대해 말이 많은지 이제 이해할 것 같다.


하지만 오늘 옵션 하나를 골라줬기 때문에 S는 본인의 장문 메일 능력을 뿌듯해 할 것 같다.


역시나 얼마 후 S는 또 장문의 메일을 보냈다.

이번에는 더 길다.

“아…” 머천트 팀의 탄식이 들렸다.

나는 참조인이다.


굿럭~.


Photo by Solen Feyissa on Unsplash



이전 08화 T 가 사라졌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