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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물, 노래

by 신선경

계속-

매주 화, 수요일 밤에 연재됩니다.





그녀는 새벽녘 하늘을 그린 듯한 머그잔을 들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얼음을 한주먹 집어넣고 옆 칸에서 더치커피를 꺼내 부었다. 손목을 두 번 돌리고는 바로 반을 비워버렸다. 창가 앞 테이블로 가서 4센티미터쯤 창문을 열었다. 고요했던 거실에 빗방울이 날아다녔다. 화연은 바깥공기를 코로 들여 마시다 어깨가 떨렸지만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7시에 눈이 떠진 걸 보니 어제 많이 늦은 건 아니었나 보다.

작년 11월 이후 2병만 마셔도 취하길래 술 약속을 피했다. 집에서 가볍게 맥주나 소주를 마시는 게 편해졌는데 어제는 오랜 친구 앞이라고 마음을 놓았나 보다. 소주 4병을 마셔도 멀쩡한 승준. 허리를 곧게 세우고 무슨 말을 한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난다.

여자친구와 다투고 기분이 안 좋았을 텐데 취해서 잘 들어주지 못한 것 같아 메시지를 보냈다.

[승준아, 어제 잘 들어갔지?

미안~~ 나 이제 일어났는데 어떻게 왔는지 기억이 안 나네 ㅎㅎ

바래다줘서 고맙고 다음에 밥 살게~ 여친구랑 잘 풀고! 주말 푹 쉬어~]


아이패드로 팝을 틀어두었는데 가요로 넘어갔다. 요즘은 잘 안 듣는 플레이리스트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노래를 들으면 가사 한 줄 한 줄이 고통스러웠었다.



「혼자 이별을 하고 가버리면 난 어떡하라고

너 없는 하루를 살아보고

너 없는 채로 잠들어 본다.

잊을 수 있다고 다짐을 해보고

다 잊은 척 웃어도 보고

별일 아닌 듯 혼자 영화도 보고

너의 빈자리 채워본다.

가끔 보고 싶어 견디기 힘들면 나 하루 종일 너를 찾아 헤매보고

손잡고 걷던 거리에 우두커니 서서 혹시 네가 올까 가슴 설레본다.

잘 살 수 있다고 다짐을 해보고

태연한 척 웃어도 보고

드라마처럼 혼자 취해도 보고

널 잊으려고 하면 할수록

너무 보고 싶어 견디기 힘들어

비틀거리며 너를 또 찾아 헤매고

나란히 걷던 이 길에 나만 혼자 남아 눈물 삼키면서 너를 기다린다.

날 그토록 사랑해 주던 너란 사람은 어디까지 간 거니

너무 보고 싶어

견디기 힘들어

오늘따라 난 네가 너무 보고 싶어

‘너무 보고 싶어’ _어쿠스틱콜라보」



화연은 얼음만 남은 머그잔을 한쪽으로 치우고 테이블 위 노트북을 가까이 가져왔다.




제목 '화병에 빗물을 채우는 6월'


반년 하고도 보름쯤

그만 아파도 되는 거 아니니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아침에 충혈된 눈은 한참을 그리워했나 보다

얼마의 시간이 더 필요한 걸까

잘 지내겠지?

꼭 그래야만 해

그리고

이만 가줬으면 해

아니다

넌 잘 갔는데, 널 놓아야 하는 건 나구나

.

.

고마웠어.

너 때문에 290가지 넘는 꽃 이름을 알게 되고 좋아하는 꽃도 다양해졌어.

앞으로도 끔찍하게 생각하지 않아 볼게.

집에 다시 꽃을 둘 수 있을까?

용기가 더 필요한 일인 것 같지만, 마음이 옅은 미소를 슬쩍 내미는 것 같아.

그래도 서두르지는 않을래.

좋아! 비가 그치면 나서볼게.

파란 하늘이 뜨고 솜사탕 같은 노을이 포개지면 분홍색 장미를 안아 볼게.

빗물이 꽃잎 되어 진한 향기를 내도록




심해로 빠져서 그대로 올라오지 못할까 봐 1월에 블로그를 만들었다. 뭐라도 쏟아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5월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로그인하고 첫 글을 발행했다.

화연에겐 1월 1일도 새롭지 않았고, 봄바람도 설레지 않았었다. 오픈 1주년은 피하겠다고 손해 보며 가게를 내놓았지만 아직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더 이상의 핑계는 용납할 수 없었다. 짧지만 글을 쓰고 나니 울렁이던 속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느새 비는 그치려고 하고 있었다.



'사랑만하자' 님이 댓글을 남겼습니다.

-어머~~ 못먹는것사주지마라님 비 오는 날 감성 가득한 시네요~~


'그만하자제발'님이 댓글을 남겼습니다.

-사주지마라님의 실제 이야기인가 궁금하네요. 시가 구슬픕니다. 비 오는 날에 감성 느끼고 갑니다.


'서울누수다잡아'님이 댓글을 남겼습니다.

-오늘도 활기찬 글 잘 읽었습니다!!

행복이 넘치는 주말 보내시고 제 블로그도 놀러 오세요?



화연은 노트북을 닫고 창문을 최대한까지 활짝 열었다. 25층에서 바라보는 밖은 차분했다. 청소기를 돌리니 기분 좋은 허기가 돌았다. 식빵 두 장과 달걀 한 알을 꺼내두고 조리 BGM은 오랜만에 듣는 곡으로 골랐다.



「주주클럽의 '나는 나'

때때때때 때때때때 때때때때 때때 때

왜 내가 아는 저 많은 사람은

사랑의 과걸 잊는 걸까

좋았었던 일도 많았을 텐데

감추려 하는 이유는 뭘까

이유가」



'나비는말이지'님이 비밀댓글을 남겼습니다.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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