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층 | 맞춤 수제화
닫힌 창고 문을 막고 선 남자는 온몸이 유나를 향하고 있었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조명이 그녀를 반쯤 비췄는데 그게 그를 더 뜨겁게 만들었다. 남자의 눈이 매끄러운 얼굴선을 따라 그리다 복숭아 꽃잎 같은 입술에 멈췄다. 반면 유나의 시선은 철제 선반 맨 아래 무광 구두에 고정되어 있었다.
남자는 가죽 냄새 사이로 풍기는 복숭아향을 더 가까이 맡고 싶었다.
-다음 주에 친정에 가니까 우리도 어디 가서 하루 있다 오자.
볕에 익은 단단한 두 팔이 유나의 어깨를 감쌌다.
-가서?
그녀의 미간이 좁아졌지만 목소리는 높지 않았다.
-우리 둘이 고생했는데 가서 좀 쉬자고. 장사하며 제대로 여행해 본 적이 없네.
여행이 불편한 단어였나? 유나는 대꾸할 말이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따귀 한 대 쩍 소리 나게 때리고 나가면 될까? 생각과 다르게 몸은 힘이 빠졌다.
-당신도 나 좋은 거 맞잖아, 아니야?
어깨 위의 손이 부드럽게 쥐어졌다. 얼마 전부터 남자는 유나랑 둘이 있으면 ‘당신’이라고 불렀다. 남자는 집에 가서 잠들기 전까지 메시지를 보냈는데 유나도 두 번째엔 답을 하고 말았다. 그럴 때면 가슴부터 이마까지 열이 올랐다.
-집에 가자, 피곤해.
-경주로 갈까? 가게 문 일찍 닫고 가자.
-안 가. 오빠는 이러면 안 되는 사람이잖아.
-분가하면 바로 정리할 거야. 말했지만 방도 따로 쓰고 거의 말도 안 해.
자신을 좋아하는 착한 여자와 ‘사랑하지 않는데’ 결혼했다며 잘 곳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분가와 동시에 이혼할 거라는 말도 했다.
3년, 늦어도 5년.
-그때 다시 얘기해. 안 그러면 그만둘 테니까 사람 구해.
여지를 준 것 같아 주워 담고 싶었다. 유나는 딱 자르지 못하는 자신이 불쾌한데 남자가 불쌍하기도 했다. 미쳤구나 싶었다.
1층 | 화 (꽃)
화연히 다시 우산을 들고 가게를 나서니 15미터 앞에 승준이 보였다.
하늘색 면 셔츠 위로 짙은 눈썹을 들썩이며 그녀를 향해 한쪽 팔을 세차게 흔든다. 여자친구와 싸웠다며 한잔하자는 메시지에 답장도 안 하고 전화도 안 받았다. 그는 익숙한 일이라는 듯 열일곱 때의 천진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승준은 화연과 동갑인 서른셋이다. 둘은 고등학교 동창에 유일한 예체능 합반이라 3년 내내 같은 반이었다. 각자 어울려 지내는 동성 친구들이 있었지만 서로 두루두루 잘 지냈다. 미술을 전공한 승준은 4년제 대학에 갔고 해병대를 지원해서 다녀온 후 좋아하는 자동차 디자인 부서로 취업했다.
-여자친구가 나랑 만나는 거 싫어한다고 안 했어? 근데 여길 오냐!
화연은 승준 앞에 놓인 소주잔을 툭 치고는 7부 채운 술을 단 번에 넘겼다.
-이제는 안 그래~ 언제 한번 언니랑 보자고 하던데?
승준도 잔을 비움과 동시에 빈 잔을 채우고, 도미회 한 점을 화연의 접시에 올려놓았다.
-그게 진심으로 나를 보고 싶어 서겠어? 으이그.. 그래서 왜 싸웠는데?
화연이 맑은 술을 다시 한 모금 넘겼다. 오늘은 술이 더 달았다. 가늘어진 비는 낭만을 노래하고 있었고, 새끼손가락보다 얇게 썰린 회는 씹을수록 고소했다. 맛 좋은 리듬으로 잔도 부지런히 채워졌다.
-결혼하자고
-아...!
-2년만 기다려달라는데도 자기는 꼭 서른에 해야 한다잖아.
-왜? 요즘 서른이면 한참인데!
-친구들이 일찍 해서 더 그런 것 같아. 서른 넘으면 임신도 어렵다고 그랬다면서
-다시 잘 얘기해 봐~ 아니면 미리 혼인신고를 하거나. 여자친구가 불안하지 않게 해 주라고
화연이 친구를 향해 잔을 내밀었고 그가 같은 높이로 맞춰 부딪쳤다.
승준은 술이 쓰지도 달지도 않고 싱거운 맹물처럼 느껴졌다. 부모님의 사업 빚을 같이 살며 대신 갚으며 가장의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빚을 다 정리하려면 1년 정도 남았고 결혼자금을 모으려면 1년은 더 필요하다고 여자친구에게 진작부터 얘기했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본심은 따로 있었다.
-넌 가게 팔고 진짜 포항으로 가게?
-해남이거든요~ 땅끝마을로 가서 글이나 실컷 쓰게. 가끔 여자친구랑 놀러 와. 거기 회는 더 기가 막히겠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화연은 이론에는 흥미가 없었고 삶과 사랑을 이야기하는 창작을 꿈꿨다. 졸업 후에도 몇 년 동안 작품 소식이 없으니 방송작가 지인이 교양 프로그램 자리를 소개했다. 경험을 핑계 삼아 일한 지 9개월, 건조한 대본 쓰는 게 적성에 안 맞아 고달프던 참에 그를 만났다.
게스트와 촬영 전 미팅을 하던 날, 말주변이 없는 친구를 대신해서 그와 대화를 주고받게 됐다. 1시간의 미팅이 끝났을 때는 서로에게 똑같은 인상을 남겼다.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
다섯 살이나 어린 그는 화연에게 적극적이었다. 방송대본을 쓰며 두통에 시달리는 여자친구를 위해 향기로운 꽃을 만날 때마다 안고 왔다. 장미 종류를 죽기 전까지 다 볼 수 없다는 걸 남자친구 덕분에 알게 됐다.
어느 날부터 집에 들어가서 받은 꽃의 꽃말을 찾아보는 게 화연의 마무리 일과가 됐다. 그와 같이 있는 시간 외에 가장 설레고 즐거운 일이었다. 매일 밤 그녀는 꽃말을 노트에 적어두고 있었다. 그러다 결심이 섰다. 툭하면 야근하는 방송작가는 그만두고 그와 결혼해도 지장을 안 줄 예약 꽃집을 여는 것.
꽃들에 묻혀 쓰고 싶은 글을 행복하게 쓰겠노라 기대한 화연은 이제 꽃에서 향기를 맡지 못했다.
그가 떠나고 글이 써지지 않은 지도 반년을 넘기고 있었다. 가게를 정리해야 모든 걸 깨끗하게 비울 수 있을 것 같은데 기약 없는 기다림 중이었다. 문득 크리스탈에 갇힌 얼음 장미가 떠올랐다.
-화연아.
얼어버린 꽃이 부드럽지만 또렷한 주문으로 풀렸다. 화연이 고개를 들었다.
승준과 마주 앉은 지 1시간쯤, 초록색 빈 병은 세 개가 올려져 있었다.
춥지 않지만 차가운 바람이 부는 5월 밤이었다.
계속-
매주 화, 수요일 밤에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