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완벽한 날씨

by 신선경






구름 한 점 없는 5월, 강수 확률은 0%.

완벽한 하늘 아래, 청담동 한복판의 건물은 수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사람들이 오가며 바삐 움직이는 곳.

누군가는 매일 거기 있어야 했고, 어떤 이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1층 | 화 (꽃)


가위로 장미 모가지를 댕강 날려 먹었다. 부동산과 온라인 카페에도 가게를 내놓았으나 이번 주는 한 통의 연락도 없다.

들뜬 얼굴을 보는 것이 꽃들만큼 지긋지긋해서 점심 지나서 가게를 열었는데 바로 손님이 왔다. 지난달부터 매주 오는 이 남자는 내일 로즈데이라고 또 온 모양이다. 파란 색소 입힌 장미를 흰색 포장지로 감싸고 하늘색 리본을 묶다가 그의 미소가 떠올랐다. 이 장미처럼 차갑게 돌아서 버린 사람.

화연은 애꿎은 장미를 노려보다 눈앞의 남자한테까지 한소리하고 싶어 져서 냉큼 꽃다발을 넘겼다.


한때 그녀도 꽃을 좋아했다.

창피를 무릅쓰고 어디서든 꽃을 안고 있던 사랑스러운 연인이 있었다. 그를 만나며 꿈도 하찮아졌다. 직장을 그만두고 그의 회사 앞인 이 자리에서 하루 종일 같이 있고 싶어 연 꽃집.

화연의 이름을 따서 '화 花‘ 그가 지어준 가게 이름이다.

크림 톤 배경에 진달래색 글씨, 크게 고민 없이 결정한 간판을 단지 곧 1년이다. 오픈 1주년에는 가게 문 닫고 유럽 일주를 하자더니.

그가 떠난 지 7개월이 되었다. 제거한 장미 가시를 신문에 구겨 담고 괜히 발로 더 밟았다.


'6월 20일 전에 남쪽으로 가자, 서울에서 가장 먼 땅끝 바다로 가버리자'


내일 부동산에 전화해 권리금을 오백만 원, 아니 천만 원 더 내려야겠다고 생각하며 간판 불 켜지기 전 서둘러 문을 나섰다. 멈춰 선 화연의 와인색 단화에 물방울이 튀었다. 요란한 소나기였다.


하. 0%라며!!








2층 | 도자기백화점


올해 67세 배 사장, 이 시대에 필요 없어지는 것은 자신인지 이 그릇들인지 모르겠지만 꿋꿋이 지키고 있다.

업종을 바꾸려고 물건도 채워두지 않아서 단골손님도 빈손으로 돌아가는 형편이다.


-어르신, 제값 받으실 수 있을 때 넘기세요. 1층 거기 아시죠? 몇 달째 나가지도 않잖아요. 산다는 사람 있을 때 파셔야 돈 버시는 거예요.


-... 지금이 몇 년도죠? 그렇군... 서른이 되었구나.


-예? 나이요? 제가 좀 동안이긴 한데 서른은 훨씬 넘었습니다. 하하


-아, 가게 지금은 안 팝니다. 괜찮소.


부동산 직원이 나간 이후 두꺼운 유리문은 움직임이 없다. 1시간째 문 너머에 머문 시선이 힘없이 휴대전화로 옮겨졌다.


-어디에 있는 거냐...


아들은 자신을 알기 위해 여행을 떠났다. 처음 3개월은 꽤 진지하다고 여겼으나 1년이 지나도 안 오니 걱정됐고 2년이 지난 이후로는 연락도 없었다.

서른이 되었는데 아직 못 찾았단 말인가, 아니면 거기가 좋은 건지 배 씨는 들은 말이 없다. 다정한 성격은 아니었지만 무책임하지도 않은 아이였기에 이젠 애가 타고 속이 탄 지 오래다. 혹시나 하는 고드름 조각이 자라려고 하자, 배 씨는 마른 수건을 집어 들고 일어섰다. 아침에 닦아 윤기 나는 코렐 접시를 다시 힘주어 문지르고 문질렀다. 거기엔 배낭 하나 메고 현관을 나서던 아들이 있다. 돌아오면 11년 넘은 가게를 유행에 맞게 바꾸자며 후보들을 기대하라는 듯 외꺼풀 눈을 반짝였었다.

서른 살 생일에 어차피 물려줄 생각이었기에 미주알고주알 묻지도 않았는데 후회가 된다. 곧 아들의 서른 번째 생일인데 그릇이라도 채워야 하는 건지 텅 빈 진열장이 처량하다.


위층과 아래층의 문들이 다 닫히고도 한 곳의 조명은 한참 동안 꺼지지 않았다.






계속-

매주 화, 수요일 밤에 연재됩니다.




keyword
화, 수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