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층 | 중고 명품
간판 불이 꺼진 가게에서 두 여자는 오늘 매입된 상품을 정리 중이다.
한 명이 박스에서 가방을 꺼내 놓으면 가는 팔이 재빠르게 진열장으로 옮겨 놓았다. 혼자 끊임없이 말소리를 내는 건 검은색 선글라스 모형의 블루투스 스피커였다.
[삼척 경찰서에 따르면 오늘 오전 5시 3분께 "삼척시 등산로 인근에 남자가 쓰러져 있다"라는 등산객 신고가 119에 접수됐습니다. 소방 당국이 현장에 도착했을 당시 이 남성은 산 입구로부터 5분가량 걸리는 곳에 있었고, 시신이 훼손되어 정확한 얼굴이나… ]
-그릇 집 사장님 실종 신고는 하셨나? 우리라도 대신해야 하는 거 아닌가 몰라! 세상에...
20분째 침묵으로 가죽만 만지던 소진은 적절한 핑계를 찾자 말을 꺼냈다.
-세상에~ 그래 넌 오늘도 집에 안 들어가니?
루비색 토트백을 건네며 미숙은 본심이 튀어나왔다.
-지연이네 가려고
-유서방은 연락 없고? 내가 전화 한 번 해봐?
-절대. 하지 마! 엄마.
가운데 칸에 두었던 루비가 유난히 밝아, 다시 아래로 내리고 블랙 버킨백을 올렸다.
-이혼 그렇게 쉽게 생각하면 안 된다.
주인 잃은 중고 가방처럼 딸이 다시 돌아올까 봐 미숙은 알감자 하나가 내내 명치에 걸려 있었다.
소진과 함께 있는 공간이 불편했던 적 없었다. 결혼 전까지 30년을 같이 살았고 가게에서도 매일 보는데, 1년 만에 다시 집에 온 딸은 어떻게 대할지 몰랐다.
첫날엔 야식으로 닭발도 시켜 먹고 오랜만에 한 이불 덮고 잤다. 다음 날이면 사위가 가게로 와 데려갈 줄 알았는데 1주일이 지나고 보름이 넘도록 소식이 없으니 겁이 났다. 아무렇지 않게 자식의 선택을 존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미숙은 자신의 불안함이 딸도 그렇게 만들까 싶어 말을 삼갔는데 오늘은 그러지 못했다.
-쉽게 생각한 적 없어. 그렇다고 심각하게 받아들일 일도 아니고. 내일 봐 엄마, 고생했어요.
소진은 핑크색 미니백 위치가 매우 마음에 안 들었지만 오늘은 이만하기로 고개를 돌렸다.
'심각하지 않다고?'자신이 이혼을 생각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다음날이면 남편이 찾아와 싹싹 빌 거라 생각했다. 이번에 만나면 단단히 그 버릇 고치겠다 마음먹었는데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소진은 지하 주차장에서 차 문만 잠근 채 30분쯤 앉아 있었다. 5분에 한 번씩 휴대전화를 들었다 놨다 반복하며.
더 이상 엄마 집에서 같이 있다가는 속을 들킬 것 같았다. 크게 숨을 내쉬고 소진은 차의 시동을 걸었다.
1층 | 맞춤 수제화
철컥. 창고 문이 닫힌다.
-... 이러지 말자.
-왜 안 되는데?
남자의 손은 뿌리쳤지만 유나는 이미 거부하기 힘들어지고 있었다.
-이유를 몰라서 묻는 거야?
남자의 눈과 마주치면 유나는 화를 낼 수 없었다. 둘은 그럴 상대도 없었다. 점심때 다녀간 여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남자를 닮은 아이를 등에 업고 커피 두 잔을 들고 와서는 남편 잠버릇 흉을 보며 웃었었다.
남자와 처음 만난 건, 12년 전 유나가 열일곱 살 때이다.
같은 학교에 인기 있는 귀여운 오빠를 좋아했고 남자는 그의 같은 반 재밌는 친구였다. 168cm 키에 눈이 내려앉은 듯한 피부의 유나는 짝사랑할 이유 없이 귀여운 오빠와 커플이 되었다. 복도에서 3학년 언니들에게 둘러싸여도 초코우유를 들고 계단을 오르는 당찬 1학년 소녀였다.
달콤한 우유를 좋아하던 오빠는 어디서 무얼 하는지 모르지만, 재밌는 남자는 고등학교 졸업 후 여성 신발을 팔고 있었다. 가게를 새로 오픈하며 함께 일하자고 했을 때, 마침 이직을 고민했던 유나는 반가워했다. 남자는 상대의 비위를 잘 맞췄고 유나도 넉살이 좋아서 찾아오는 단골이 늘고 있었다.
첫 회식을 하던 1주일 전,
소주 한 잔 마시고 얼굴이 타오르는 남자가 택시 안에서 유나의 오른쪽 어깨에 머리를 올렸다. 정신없이 바빠도 재밌게 일하던 곳에서 웃을 수 없는 일이 생긴 것이다.
그 이후로 퇴근하는 차 안에서 남자의 왼손은 핸들을, 나머지 한 손은 유나를 향해 내밀었다. 팔짱을 끼고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그녀의 눈은 안개 낀 밤과 닮아져 갔다.
오늘부터는 혼자 퇴근하겠다고 말하는 유나의 팔을 잡고 남자는 안쪽 창고로 끌어 문을 닫았다.
계속-
매주 화, 수요일 밤에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