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학대당한 줄도 모르고 살았다.

by 써니

나는 은 홀어머니의 고생을 무시한 채로 매서운 사춘기를 보며 가족들을 힘들게 했.

천재라고 찬사 받았던 기대와 달리 학교 공부도 잘 따라가지 못했다.

할 일 없이 운동장에 앉아 시간을 보내다 해가 다 저문 후에야 집에 들어갔다.

우리 가족 중에서 나만 문제였다.


무의미하게 러간 시간 덕에 어찌어찌 대학 졸업하여 어른이라는 형식적인 무늬를 얻다. 나의 값싼 노동력을 팔아 취업도 하게 됐다. 그러던 중 회사생활의 어려움으로 2020년 7월, 공황장애가 발생게 됐다. 약이라도 처방받기 위해 동네에서 평이 좋은 작은 정신과의원을 방문했다.

의사는 증상이 심각하기에 진료를 보기 어렵겠다며 상급 병원 진료 의뢰서를 써주셨다.


의아했지만 가까운 대학 병원으로 진료를 보러 갔다.

병원에서는 40만 원이 넘는 검사를 비롯한 각종 검사, 본 병원에서 진행하는 상담 치료를 권했다.


나는 공황장애 말곤 별 문제가 없다 느꼈기에 왜 자꾸 치료를 권는 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내게 돈을 뜯어내려고 한다 생각했다.

그렇게 불신이 가득한 채로 1회기에 9만 원이나 하는 상담치료를 시작했다.


첫 상담 6년 전 일이라 생생하진 않만 순간들이 떠오른다.

상담사는 내 이야기를 듣던 중 여러 차례 오묘한 표정을 짓더니 가족에 관련된 일화를 몇 가지 물어봤다. 대답을 들은 후 약간은 개운한 표정으로 말했다.

"왜 ㅇㅇ님이 자꾸만 남자친구와 헤어진 일에 힘들어하고 집착하는지 처음에는 이해가 잘 안 됐는데 이제 알겠어요. 치료 방향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알겠네요."

나의 이야기만 주저리 늘어놓았던 1시간의 상담이 종료된 후에도 이해하지 못했다.

고작 몇 가지만 들어보고 나에 대해 뭘 알겠다는 건지.


여전한 의문을 안고도 토요일 3시에 맞춰 매주 병원으로 향했다. 상담이 상황을 나아지게 해 줄 거라는 기대보다는, 정해진 시간만큼은 비난 없이 진심으로 경청해 주는 누군가가 존재함으로 외로움이 달래지는 시간을 돈 주고 사러 가는 것뿐이었다.


4번째쯤이었나.

전과 같이 가족에 관련된 일화를 눴다.

"그때 기분이 어떠셨어요?"

"음, 잘 모르겠어요..."

상담사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에요. ㅇㅇ님은 알아요. 생각해 보세요. 그때 어린 ㅇㅇ이의 기분이 어땠어요?"

입이 얼어붙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모르겠어요, 모르겠어요... 만 반복하며 그날의 순간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했다. 이상하게 온몸이 떨리고 눈물은 주먹질하듯 넘쳐흘렀다. 도 안 쉬어졌다. 상담사가 쥐어 준 휴지는 온몸에 들어간 힘 때문에 짜부라져 형태를 알기 힘들어졌다.


'나 왜 이러지?'



상담사가 이상한 점을 짚어준 적이 있다.

"ㅇㅇ님은 왜 본인이 겪은 부정적인 이야기를 말하는 데 웃으세요?"

내가 그랬나..? 당황스러 또 웃었다.

"지금도 웃으시잖아요. 지금 기분 좋으세요?"

그제야 웃음기를 거두었다.

상담사는 위험한 신호라 말하며 자신의 감정 상태와 일치하는 표현을 보여야 한다고 했다.

그날부터 나를 찬찬히 관찰해 봤다. 나쁜 기분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였는지, 아들여서는 안 됐기에 그랬는지.

그리고 표정과 마음을 달리하지 않도록 노력했다.


그래서였을까? 그날은 감정을 미처 판단해 볼 여유도 없게 눈물이 터져 나왔다.

상담이 지속될수록 천천히, 느으-린 시간의 자극으로 지난 25년의 의미가 아주 조금씩 달라졌다.

가을이 지나며 낙엽잎이 쌓이듯 아주 천천히 깨달았다.


나는 학대 생존자였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부터 온몸을 묶어 피멍이 들고 코피가 날 때까지 주먹질당하고, 소리가 새어 나올까 봐 벗어둔 양말을 입 안에 가득 물리고, 명치를 무릎으로 가격해 숨을 못 쉬어 반항하지 못하게 하고, 자고 있는 중에도 불쑥 들어와 머리채를 잡고 뺨을 때렸던 건,

내가 맞을 만한 짓을 한 악귀 씐 애라서가 아니었다.

애정결핍에 남자면 좋다고 실실 대는 화냥년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건,

그들이 멋대로 생각했던 거였고 나를 애정결핍으로 키운 잘못이었다.

고아원에 리지 않고 키워준 것에 감사해야 한다며 용돈을 주지 않아 중1 때부터 핸드폰 요금을 내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했고, 겨울과 여름에 벌을 주겠다며 전기장판과 선풍기를 빼앗고, 가스 요금이 아깝다고 샤워 중에 보일러를 꺼버린 건

보호자로서 책임을 다하지 않은 것이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거짓말이 섞인 험담을 하고 면박을 주는데, 신경 쓰기 귀찮았던 그들은 제지하지 않고

"엄마가 얼마나 불쌍한 사람이니? 그러니 네가 엄마한테 좀 잘해라"라는 말을 어린아이에게 내뱉어버리고,

내 아버지를 싫어했던 큰 이모부에게 "아비 없는 년 티 난다, 쟤는 곧 모르는 남자의 애를 임신할 거다."라는 막말을 들었을 때도 되려

"네가 못나서 나까지 혼났다"라며 화를 냈던 건,

엄마도 주변 사람들도 어른이 아닌 미성숙한 방관자들이었던 것이다.

자살 시도에 실패하여 토를 하고 있을 때

"미친년 또 쑈 한다, 죽을 거면 제대로 죽어라. 괜히 살아서 병신 되면 나만 고생스럽다."라고 말하던 것, 언니가 나랑 같이 밥 먹기 싫다고 하니 접시에 옮겨 담아 내 방 앞에 두던 것,

밥 먹는 순서, 옷 입는 것 등 모든 것을 통제했던 것,

가방을 뒤져 누군가에게 받은 애정 섞인 편지를 기어코 찾아 내 책상 위에 펴서 올려 두던 것,

제발 어린 날 내게 했던 짓을 사과해 달라고 울고 불며 애원할 때

"그 모든 것은 부모니까 할 수 있는 일이고, 부모는 자식에게 사과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은 틀린 말이었던 것이었다.


깨닫는 순간은 매번 생경한 충격이었다.


나는 나만 이상한 줄 알았다.

그런데, 나만 빼면 아무 문제없는 줄 알았던 우리 집이 이상했다.

홀로 자식을 키우는 불쌍한 엄마로 알던 여자가 이상했고, 과중한 책임감이 지워진 장녀인 줄 알았던 언니가 이상했다.

누군가는 어떻게 학대당한 것을 모를 수가 있느냐 하겠지만

태어난 순간부터 세상의 전부인 가족에게 매 순간 가스라이팅을 당며 살아보니 든 것은 내 탓이 되고 세상은 자기 비하로 가득 차게 더라는 경험을 앞세워 변명하고 싶다.

그럼에도 왜 그들을 바로 원망하거나 끊어내지 못했냐고 묻는다면

"너 때문에 인생 포기했고 내 인생 망쳤다"라는 엄마의 말을 들으며 죄책감 속에 살기에,

가끔씩 생일날 끓여 준 밍밍한 미역국나, 거실에 있는 미술시간에 그려온 그림이나, 하나 남은 붕어빵을 손에 쥐어준 순간 같은 자질구레하지만 사랑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흔적들을 찾아다녔기에, 홀로 미치도록 감동스러워 수없이 곱씹어 봤기에 그들을 미워하지 못하기 때문이라 답하고 싶다.

왜 그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발버둥 쳤냐 묻는다면

작은 내 삶을 전부 채운 엄마와 언니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답하고 싶다.

그들이 나를 정말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다면 나는 저 땅끝으로 곤두박질쳐 버린다는 걸 알기에 그냥 그렇게 믿고 싶었다고 답하고 싶다


40만 원을 넘게 들였던 검사의 결과 한 달 뒤 인할 수 있었다. 불안 긴장수치가 100에 가까웠다. 자살 위험이 높고 트라우마가 심한 우울증이었다. 아주 오래 고착되어 생활화가 되어 있었다. 공황증상도 우울증으로 인한 신체반응이었다. 그로 인해 몇 개 항목의 인지지능은 경계선까지 떨어져 있었다. 복용하는 약도 매주 추가됐다.

병원에 가던 날까지도 공황만 빼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자신했던 내 정신도 사실 이미 무너져있던 것이다.


직면의 과정은 느리고 고통스러웠지만,

직면 후 세상은 적응하기 어려울 만큼 급변해 갔다.


그러나 여전히 답을 알 수 없기에 괴로운 의문이 덩그러니 남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월,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