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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 Chun Sep 17. 2020

나쁜 것이 나쁜 게 아니네

선택과 공감

정신없이 어디론가 질주하던 인생 열차에서 명퇴라는 정거장에 내린 지 2년이 지났다. 그리고 항시 주변에 있었지만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것들을 마주한다.



우리 국어사전에서 중년은 대략 40세 이상 ~ 50대 안팎의 연령에 있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현재는 베이비부머 세대가 주를 이룬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50 플러스 세대라는 말이 등장해서 중년이란 단어와 혼용되고 있다. 50 플러스 세대란 용어는 50세~64 세를 일컫는 말로 노령화에 따른 인구분포 변화가 바뀌면서 만들어진 듯하다. 인간의 수명 연장에 따라 UN에서는 2015년에 중년의 나이를 66세 ~ 70세로 정의했다. 그러고 보면 사실 나는 한참 일해야 하는 나이에 경제활동을 멈춘 셈이 된다. 아직 중년이 많이 남았는데 말이다.


사실, 나의 은퇴시기는 아주 오래전에 정해져 있었다. 아이들이 대학을 졸업하는 시점으로...

이후에는 누구나 꿈꾸는 자유의 삶을 살기로 계획했던 터라 정년을 7년 앞당기는 선택에 망설임이 없었다. 은퇴까지의 인생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은퇴 후 개인 비즈니스와 함께 여행을 만끽하며 살 거라는 목표를 세우고 설렘이 컸었다.


그간 연구해왔던 테마를 기반으로 하는 1년간의 벤처창업 준비도 순조롭게 진행되어 인생 참 쉽다는 오만함이 고개를 들기 시작할 무렵 고약하기 짝이 없는 코로나 19라는 불청객과 마주쳤다.


코로나는 내가 계획했던 모든 일과 여행의 목표를 완전히 망가트렸고, 동시에 세상 밖에만 머물렀던 나의 시선을 집의 울타리 속으로 고정시켜 버렸다.  


 퇴직과 함께 나름 완벽하게 준비했던 제2의 인생 계획이 벽에 부딪치고 나니 뭔가 해야 할 일을 찾지 않으면 병이 생길 것 같았다. 목표가 생기면 적극적이고 활동적이었던 습성이 몸에 배어 있던 탓에 집에 갇혀 지내는 것 자체가 왠지 모를 불안함과 초조함에 편치 않았다. 


고민 끝에 묵묵히 집 안과 밖의 이런저런 것들을 보수하고 새로 만들며 뜨거운 여름 햇볕의 따가움도 잊은 채 육체적인 노동과 함께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시작은 마음의 감옥에서 탈출하기 위해서였으나, 정지해 버린 시간 속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발버둥을 치며 하루하루를 넘기다 보니 집이 곧 일터가 되어버렸다.

2.5평 창고

화장실 실내를 바꾸고, 테라스를 보수하고, 집 외부를 색칠하고, 개러지 바닥공사를 하고, 주변 나무를 자르고, 백 야드에 창고를 짓고,... 퇴근하면 온몸이 아프고 저렸다. 그렇게 또 1년이 지났다.


노동의 일터에 적응될 즈음, 힘든 하루하루 속에 흘린 노동의 땀방울들이 왠지 모를 불안함과 초조함을 조금씩 내 마음에서 덜어주고 있었다.


고생 끝에 창고를 완공하거나 테라스 보수가 끝나고 나면 그때마다 예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성취감이 작지 않은 행복을 가져다준다. 그러고 보니 "나쁜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는 인생의 진리를 새삼 깨닫게 된다. 인생 계획대로 벤처 창업에 성공했다고 한들 내가 꿈꾸던 모든 상황이 현실이 될 거라는 보장은 없으니 말이다. 


새로운 일도 생겼다. 특정 분야의 칼럼을 쓰거나 브런치에서 만들어진 공간에 글을 올리는 것이다. 고약한 코로나 19가 내게 육체적 노동의 기쁨과 함께 글이라는 매개로 나 자신의 내면 세상과 대화화 할 수 있는 기회를 함께 만들어 준 셈이다.




망치질을 하다가 갖는 잠시의 휴식에서 지금껏 살아온 나의 언행을 되돌려 내가 무엇이 부족했는가를 깨닫는 소중한 시간들을 만난다. 일터의 갈증을 식혀주는 시원한 그늘과 수박 한입이 주는 기쁨을 전에는 깨닫지 못했다.

글을 쓰는 시간은 머릿속 깊게 감추어진 추억을 꺼내어 돌아보게 하는 특별한 시간이 되고, 생활 속에 작은 것들을 바라보게 한다.

아내가 차려주는 밥상의 소중함,

아침 식탁에서 큰 의미 없이 나누는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가 주는 즐거움,

텃밭에서 자라는 채소가 식탁에 올라왔을 때 느끼는 만족감,

......


Barvara Ann Kipfer의 저서 "나를 행복하게 하는 14,000가지(14,000 things to be happy about.)"를 생각나게 한다. 특별한 설명 없이 몇몇 단어들의 나열을 통해 느낌을 전달한 인상적인 책이다. 문화적 차이 때문 인지 공감할 수 없는 것들도 있고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것들도 있었다. 그러나 생활 속에서 수십 년에 걸쳐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들을 14,000 가지나 발견하고 나열했으니 그녀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일까?


아직 내가 발견한 행복은 14,000가지에 턱없이 부족하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예전에 알지 못했던 작은 것에서의 귀중한 행복을 하나씩 만나고 있다는 것이다.



우생마사(牛生馬死)!

말과 소가 장마에 휩쓸려 강물에 빠지면 말은 죽고, 소는 살아서 걸어 나온다고 한다. 평시에는 물속에서 말이 소에 비해 2배쯤 빠르게 수영을 한단다. 하지만 급류에 휩쓸리면 말은 빨리 벗어나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발버둥 치다가 탈진해서 죽는 반면 소는 급류에 몸을 맡기고 떠내려 가다가 발이 닫는 뭍에 이르러 걸어 나온다.


 당장 말이 몇 미터 더 땅에 가까워졌다고 소보다 상황이 좋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잊고 살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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