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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 Chun Sep 26. 2020

적당함에 대한 선택

선택과 공감

적당(適當)이라는 말은 한자 의미로 보면 적합할 (적) 마땅할 (당)으로 "정도에 알맞다"는 의미가 있으나 대충이나 대강이라는 의미로 통용되는 경우가 많다. 굳이, "적당함"이라는 말을 되돌아보고 싶은 이유는 적당함이 갖는 애매모호함 때문이다.


살면서 해야 하는 크고 작은 모든 선택에 있어 "정도에 알맞은 것"을 지향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가장 상식적인 접근방법이며, 정도를 벗어날 때를 비정상적이라고 말한다.


직장에서 동료가 일을 적당히 하라는 말은 분명 열심히, 열정적으로 하라는 말과는 거리가 멀다. 타인에게 책임이 전가되지 않는 정도로 상황에 따라 눈치껏 하라는 말이 아닐까?

하지만 직장상사가 "김대리, 적당히 하고 퇴근하지!"라고 하면 이것은 "나는 김대리가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는 것을 알고 있어"라는 칭찬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어 보인다.


때로, "적당히"란 말이 본래의 말뜻과 달리 그만하라는 말로 쓰일 때는 이미 정도를 지나쳤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정도의 절대적인 기준이 없으니 논란을 낳을 수밖에 없다.


내가 집에서 가족을 위해 요리를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여보!, 찌게 간을 좀 싱겁게 할까?"

"아니, 적당하게 해요."

"O.K!"


식사 시간에 "맞있다"는 말을 기대했지만 아내한테 되돌아온 말은 짜다는 것이다.

나는 적당하게 간을 맞추었는데 말이다.

오랜 세월 함께한 부부 사이에 적당하다는 말의 공감대는 가깝게 있지 않다.


그럼에도 한국사람들이 소통하는 데 있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 중에 하나가 "적당히"라는 말이 아닐까 한다. "적당히"라는 말은 사람마다 공감의 정도가 달라서 참으로 애매모호한 경계를 가지고 있음에도 어떤 상황에서든 매우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과하거나 부족한 것의 중간쯤을 기준 삼는 다분히 중도적 개념을 담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음식을 주문할 때 "맵게 해 드릴까요?"라는 물음에 "적당히"라는 말을 소환하면 매운맛과 안 매운맛의 중간 정도를 요청하는 것으로 이해할 것이다. 그러나 "맵다"의 기준이 사람마다 다르다 보니 적당히를 규정하는 것은 사실상 쉽지 않은 일이다.


서로가 생각하는 적당함의 기준선이 다름에도 불하고  우리 사회에서는 "적당히"라는 말에 격하게 공감하며 산다. 모든 것들을 적당하게 만드려 하며, 적당하지 않은 것에 공격적이 되곤 한다. 적당한 룰과 제도, 적당한 사람, 적당한 무엇을 찾는데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이다. 한때는 우리 경제가 곤경에 처해있는 원인으로 사회에 만연한 "적당주의"를 지목하기도 했으니 "적당함"이 가진 애매모호 함을 악용한 것에 대한 반성이었을까?.



적당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은 사회적 소통에 있어 매우 중요한 문제일 수 있다. 적당함이란 말은 모든 사람이 상식적인 선에서 이해할 수 있는 사회적인 공감대가 전제되고 쓰이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로 적당함에 대한 판단은 무엇보다도 어려운 인간사의 문제이다.


예를 들어, 대학을 진학하는 학생의 입장에서

 명문대학이지만 비전이 없는 학과를 갈 것인지,

ⓒ 알려지지 않은 대학이지만 미래의 비전이 좋은 학과를 갈 것인지,

를 결정해야 한다면 무엇이 학생에게 적당한 선택일까?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하는 데 있어

연봉 1억을 주지만 개인의 여가를 즐길 시간 없이 죽도록 일하는 회사와,

연봉 3000만 원을 받지만 개인의 여가시간이 충분히 보장되는 회사,

중에 어디를 가는 것이 적정한 선택인 걸까?


만일, 위에서 적당한 선택을 할 수 없다면

ⓒ 중위권 대학에 큰 비전은 없지만 취업은 무난해 보이는 학과,

ⓒ 연봉은 5000쯤 받고 어느 정도의 제한적인 여가활동이 보장되는 회사,

로 절충된 안에서 선택하는 것은 적당한 것일까?


하지만, 여기에도 자신이 원하는 적당한 선택의 답은 없을 확률이 높다. 내가 원하는 적당한 선택의 답은

ⓒ 명문대학의 비전 있는 학과,

ⓒ 연봉 1억에 개인 여가시간이 충분히 보장되는 회사

이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고민하는 적당한 선택의 어려움은 자신이 정한 적당함의 기준이 적당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에 있다.


우리의 뇌 사고는 옳고 그름과 좋고 나쁨, 이득과 손실의 여부를 추론하는데 적당하게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공감대 기준이 "나" 혹은 "우리"를 중심으로 설정되는 때가 많기 때문이다.


보다 좋은 선택에 필요한 적당함의 공감대는 열린 소통의 관계에서 형성되어야 한다. 나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절대기준이 아닌 상대적 기준에서 적당함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더불어, 적당한 선택을 위한 절대기준은 없다는 것을 함께 받아들여야 한다.



인간의 "인지 사고 능력"은 환경요인에 따라서 영향을 받기 때문에 나는 항상 일관성 있는 선택 기준을 유지하면서 세상을 살고 있다고 자만해서는 안 된다.


경제 심리학자 Sheena Iyengar가 행한 선택과 관련한 실험에서 마켓에 전시된 특정한 아이템의 숫자는 고객의 구매 선택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보여준다.


잼을 판매하는 코너에 24종류의 잼 시식코너와 6가지 종류의 잼 시식코너를 만들어 관찰했을 때 24종류 잼 시식 코너에 60%의 사람이, 6종류 잼 시식 코너에 40%의 사람이 각각 멈춰 섰다. 하지만 실제 구매에 있어서는 종류가 많은 잼 시식코너의 경우 단지 3%의 사람만이 구매를 했고, 6가지 잼 시식코너에 머문 사람의 실제 구매는 30%나 되어 가짓수가 많았던 코너에 비해 6배 많은 구매 선택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또한, 같은 수의 잼을 전시한 경우도 특정 카테고리를 만들어 분류 전시를 하는 것이 카테고리 없이 전시한 것에 비해 구매 선택 비율을 증가시킨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하는 결정을 적당한 선택이라고 믿으며 살아간다. 자신의 선택이 외부적 요인에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지만 자신의 의지로 이루어졌다는 확신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에게 선택의 적당함을 받아들이라고 재촉하기도 한다.


때로, 적당함에 대한 기준은 아인쉬타인의 상대성이론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관점에 따라서 적당하지 많은 것이 적당한 것이 되기도 한다.


내가 하는 적당함에 대한 선택이 적당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한 번쯤 자기 기준을 뒤돌아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적당한 것이 진짜 적당한 것인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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