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에게 질문을 허용했다.
나는 오랫동안 질문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의문이 없다는 것은 평온이 아니라 무관함이었다.
누군가 말하면 그렇다는데… 그렇다는구나. 그렇게 흘려보냈다.
수십 년을 드문드문 교회에 다녔지만 나는 단 한 번도 목사의 이야기에 귀기울인 적이 없었다.
며칠 전 특별한 경험을 했다.
백 분이 넘는 시간 동안 나는 거의 내내 졸았다.
단조로운 이야기, 반복되는 질문과 정해진 답.
아무 생각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날 집에 돌아오며 처음으로 생각이 시작되었다.
“왜 감사해야 하지?”
예수가 죽었고 그래서 감사해야 한다고 했다.
그 말을 나는 단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날, 처음으로 이상했다.
내가 원한 적도 없고 구한 적도 없고 요청한 적도 없는 일인데 왜 나는 감사해야 하는가.
의문은 위험하다고 배웠다.
그래서 나는 그 생각을 내려놓았다.
감사하면 아무 문제도 생기지 않는다. 그렇게 정리하고 접어두었다.
그 다음 날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처음으로 교회 가는 시간이 기다려졌다.
미리 식사를 하고 일찍 도착해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행복했다.
목사가 무슨 말을 하든 지루하지도 않았고 답답하지도 않았다.
이해하려 하지 않았고 거부하지도 않았다.
그냥 있었다. 그때 알았다.
기쁨은 어디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막고 있던 것이 사라질 때 남는 것이라는 것을.
나는 왜 질문 속에서 처음으로 예수를 만났을까.
의문이 없다는 것은 그 이야기가 나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뜻이다.
“왜 감사해야 하지?”
이 질문은 그 일이 나에게 닿았을 때만 가능하다.
그 순간 십자가 위에 있던 예수가 내 옆으로 내려왔다.
멀리 있던 이야기가 아니라 내 앞에 서 있는 존재가 되었다.
나는 처음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예수는 어린 시절 성전에서 부모에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여기 있을 줄을 모르셨단 말인가요?”
그 말은 상식적이지 않다.
부모의 마음을 안다면 할 수 없는 말이다.
하지만 그 순간은 예수가 자신의 길을 걷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나 또한 묻지 말아야 할 질문을 했다.
“예수가 죽은 것에 감사해야 한단 말인가요?”
이 어린아이같고 상식적이지 않은 질문이 내가 처음으로 예수를 만난 순간이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 믿음은 의심에서 시작된다.
모든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그를 만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균열이 있어야 싹이 튼다.
단단하게 굳은 씨앗은 스스로를 밀어 올릴 수 없다.
썩지 않은 밀알이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깨지지 않는 믿음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기쁨은 변화와 함께 온다.
기존의 것이 깨어질 때 새로운 모습이 나타나고 그 안에서 삶의 다른 가능성이 열린다.
내 삶에는 균열도, 분열도, 다툼도, 불편도 없었다.
하지만 기쁨도, 놀람도 없었다.
미움도, 증오도 없었지만 사랑도, 온기도 없었다.
어려움은 없었지만 반가움도 없고 냉대도 환대도 없는 삶.
그것은 지루했다.
어쩌면 이제 나는 처음으로 지루하지 않은 삶의 입구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상식적인것을, 그리고 의심없이 받아 들고 살아왔던 것을 의심해도 된다는 자유.
나는 처음으로, 묻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아니라 물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