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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좋은아침 Mar 10. 2022

그냥 그대로....

애호박 전, 무나물, 카레, 잡채를 넣은 반찬통을 아이스박스 가방에 차곡차곡 넣었다. 그대로 들고 소풍을 가면 좋으련만 오늘은 병문안을 가야 한다. 남편의 외할머니께서 퇴원하셨는데 시어머니가 병간호를 하고 계신다. 어머니와 할머니가 드실만한 것으로 아침부터 바삐 만들었다. 

     

어머니를 잘 따르는 일곱 살 아들은 할머니 만난다는 생각에 한껏 들떠 있다. 할머니 댁에 도착해보니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아침을 드시고 잠드셔서 집안은 조용했다. 어머님 혼자서 피곤한 기색으로 부엌에 계셨다. 할아버지는 귀가 잘 들리시지 않고, 다리가 불편해서 기다시피 부엌과 방을 오가신다. 살고 계신 집이 옛날 집이라서 화장실에 가려면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가야 한다. 그래서 몇 해 전부터 간이용 화장실을 거실에 놓고 쓰신다. 집안으로 들어서자 시큼한 냄새가 가득하다.      


할머니가 아프시기 전에는 맡을 수 없던 그런 종류의 냄새였다. 할머니는 꽃을 좋아하신다. 할머니 집에 가면 사계절 내내 꽃을 볼 수가 있다. 겨울에는 수많은 화분을 집안으로 들여와서 정성껏 가꾸신다. 집에서 키우던 꽃화분이 시들어서 할머니께 가져다 드리면 다시 생생하게 꽃을 피운다. 할머니를 보면 꽃집을 하셨으면 꽃이 참 행복할 거란 생각이 들 정도다. 여전히 할머니 집에는 화분이 있다. 내가 결혼 9년 차인데 한 해가 지날수록 할머니 화분은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다.      


제일 먼저 안방에 있던 큰 화분이 밖으로 나왔다. 손을 떠시는 할머니께서 왔다 갔다 하며 물을 주는 게 힘든 게 원인이 되었다. 집안에 있던 많은 화분들은 마당으로 나왔고 추위와 더위를 견디지 못하는 녀석들은 차례대로 사라졌다. 할머니 집 대문 앞에 이번에는 큼지막한 선인장이 생생함을 잃은 채 축 늘어져 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뵙기도 전에 코 끝이 시린다. 그렇게 생생하게 잘 자라던 선인장이 꼭 할머니 같다. 우울한 생각을 떨치려고 화분을 수도꼭지가 있는 곳으로 옮겼다.  

   

물만 마시기를 기다리는 화분들을 하나하나 가지고 왔다. 어떤 녀석들은 싱싱했지만 이미 죽어서 누렇게 말라버린 녀석은 물을 줘도 살아남을 가망성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흙이 담겨있는 화분들은 다 내왔다. 집에서 조그마한 다육식물을 달랑 하나 기르는 나와 비교하면 여전히 할머니 집에는 화분이 참 많다. 시든 녀석, 죽은 녀석, 죽은 체하는 녀석, 살아있는 녀석이 섞여 있다. 가릴 것 없이 조금은 차가운 물을 듬뿍 뿌렸다. 봄이라서 꽃봉오리가 맺혀 있는 녀석은 주는 만큼 물을 빨아들이는 것 같은데 힘없는 녀석들은 주는 대로 흘려보낸다. 축져진 선인장이 내 마음을 쿵 내려놓더니, 화분에 뿌리는 물마저 내 마음을 쿵 내려놓는다.   

   

남편의 외할머니를 보면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가 생각난다. 시골에서 나고 자라신 우리 할머니는 암 수술을 받으시고 몇 년을 더 사시다가 다른 장기로 전이 되는 바람에 결국 돌아가셨다. 내가 대학교 1학년 때였다. 여름방학에 병간호할 사람이 없어서 내가 한동안 할머니와 병원에 있었다. 병원에서 먹고 자고 하는 것이 힘들었지만 더 힘든 것은 그게 아니었다. 겨울만 되면 쌀엿을 하루 종일 고아서 가래떡에 찍어주시던 할머니, 눈이 장독대에 한가득 쌓이면 눈을 쓰윽쓰윽 쓸어내서 대봉감을 간식으로 꺼내 주시던 할머니. 드라마를 보면 그 이야기를 며칠에 걸쳐서 이야기하시던 할머니.   

   

항상 정확하게 나를 보고 내가 듣던 듣지 않던 말을 하시던 할머니였는데 할머니는 병원에 나와 함께 있는 동안 단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당연하다고 생각되던 일이 당연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순간을 견디기 어려웠다. 할머니한테 찾아든 죽음이 나를 숨 막히게 했다. 개학과 동시에 나의 병간호는 엄마가 맡아서 하셨다. 나는 한동안 이유없이 아팠다. 그리고 강의를 듣던 중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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