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흔적 4

by 좋은아침

오랜만에 만난 손녀와 할아버지 마냥 우리는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누가 보면 처음 보는 사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했을 것이다. 대화를 나누 던 중 신부님은 몇 차례 손목시계를 확인하셨다. 곧 내릴 역이 다가오는 듯했다.

“오늘 순교자묘지에 가는 중인데, 가고 싶으면 같이 가겠니?”


“순교자 묘지요? 아…….좋아요.”


처음 만나 분이라서 걱정도 되었지만,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그러겠노라고 했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간이역에서 내렸다.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비를 피해서 택시를 잡아탔다. 영화 클래식에서 조인성이 재킷을 벗어서 손예진과 함께 빗속을 달리던 모습이 생각났다. 당연히 신부님과 나는 각자의 재킷을 우산으로 삼았다. 택시는 고불고불한 시골을 달려갔다. 마을을 이루는 집들이 눈앞에서 서서히 사라지니 괜스레 마음 한구석이 불안해졌다. 불안감이 내 머릿속에서 스릴러 영화 한편을 만들어 낼 찰나. 조그만 성당이 보이는 언덕 아래에서 택시는 멈췄다.


한 시간 내내 이어지는 대화에서 신부님은 나를 학생에서 딸로 부르기 시작하셨다. 나는 신부님이라는 단어가 혀에 익숙하지 않아서, 할아버지와 신부님을 섞어서 말했다. 신부님과 나는 지나가는 소나기를 피하기 위해서 성당 처마 밑에 서 있었다. 난데없이 빗줄기 관객이 되어 버린 신부님과 나. 지붕을 타고 내려온 빗줄기를 쳐다보는 이 순간이 그냥 좋았다.


“딸아, 종교는 있니?”


“없어요. 교회는 친구 따라서 여러 번 가보기는 했어요. 그냥 잘 안 가게 되더라고요.”


“난 종교는 강요하고 싶지 않구나. 저기 보이는 무덤에 묻혀있는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를 하고 싶으면 해도 되고,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된단다. 마음이 가야 뭔가를 할 수 있거든. 나중에 딸이 종교를 갔거든 그것이 네 맘을 행복하고 편안하게 했으며 좋겠구나.”


“네.”


신부님은 빗줄기가 가늘어 지자 묘지 앞에서 기도를 시작하셨다. 내가 모르는 누군가의 무덤 앞에서 있어서 일까? 잠시 두고 왔던 나의 현실이 떠올랐다. 성과에 쫓겨 살고 원하지 않는 일들을 계속해야 했던 그동안의 나의 시간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마음이 가야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그 말에 눈물이 핑 돌기 시작했다.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사는 내 처치를 위한 눈물. 내가 위로 받고 있다는 사실에 눈물. 그동안 억누르고, 무시했던 내 감정들이 가슴 저 밑바닥에서 올라왔다. 지치고 상처받은 내 감정을 하나씩 알아주기 시작하니 나를 둘러싼 감정의 벽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솟구쳐 오르는 눈물을 참으려했지만 때가 되면 어김없이 밀려오는 파도처럼 계속 차올랐다. 신부님이 기도를 마칠 때 쯤 흐르던 나의 눈물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다행이었다.

신부님은 눈물을 흘리다 못해 토해낸 나의 벌건 눈을 보고 아무 말도하지 않으셨다. 아무것도 묻지 않는 사실이 참 고마웠다.


내리던 비도 완전히 멈춘 듯 했다. 성당을 둘러싼 나무 풀들이 비 세척을 받고 나서인지 선명하고, 포근해 보였다. 마치 기나긴 힘든 삶의 터널을 통과하는 나에게 조금은 위로를 주려는 것 같았다. 그런 의도였다면 어느 정도 성공했다. 한 바탕 감정의 소용돌이를 벗어나고 보니 내 살갗으로 느껴지는 모든 것들이 따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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