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엄마 이야기

명절 처방전

by 곱게자란아빠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보내."

"조금만 참으면 되는데, 그런데 그게 쉽진 않아"

"난 그거 깨닫는데 5년이나 걸렸어"



큰 명절 즈음이 되면 갖 결혼한 남자 동료들을 앞에 두고 선임 유부남들은 한 마디씩 훈수를 둔다.

그 훈수들은 다양하지만 결국 핵심은 "상황 회피"였다.



[명절 증후군]

편하지 않는 시집에서 평소에 하지 않던 많은 양의 일을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해야 함에 느끼는 억울한 감정,

일반적으로 며느리들이 겪는 고초로 이야기되는 이 증후군은 사실 남편들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느낀다.

그 원인이 시집이나 처갓집이 아닌 본인의 아내라는 점과

그 아내의 불만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

들어봐도 마땅한 해결책이 없다는 점,

그리고 해결책도 없는 이 문제를 1년에 두 번씩 꼬박꼬박 반복해야 한다는 것에서 오는 무기력감.



결혼 첫 해 추석날이었다.

30년 이상을 지켜봐 온 우리 집 명절날과 다른 게 없었다.

엄마가 며칠 전부터 준비한 대부분의 명절 음식이 차례상에 올라오고

뭐라도 도울일이 있을까 왔다 갔다 하는 아내와

새 식구가 되고 첫 명절이니 그냥 보고 있으라는 엄마의 목소리에서는 진심이 느껴졌다.


친구들이 말하던 ‘중간에 낀 고충’은 다 기우였구나 싶었다

안도감으로 기분 좋게 집을 나와 처갓집으로 출발을 했다

조금 일찍 본가를 나오는 게 엄마에게는 조금 미안했지만,

눈치 보고 힘들었을 와이프 생각에 빠른 결정을 한 거니

나의 이런 속 깊은 배려를 알아채주고 고마워하겠지라는 기대를 안고 운전대를 잡았다.



운전해서 처갓집 가는 내내

와이프는 아침부터 지금까지 자기가 경험한 불합리한 점과 불편한 감정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나와 다른 공간에 있었던 사람처럼, 같은 대화, 같은 행동을 본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모든 것들을 다르게 해석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불만은 나의 엄마를 향하고 있었고,

내가 아는 나의 엄마와 다른 엄마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생각의 방향이 너무나 다르니 대화의 접점을 찾아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고

나는 무방비 상태에서 엄마를 지키지 못한 무능한 아들이 되어 있었고

꽉 막힌 명절 도로만큼이나 답답함으로 참을 수가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엄마의 입장이 되어 변론을 시작했다.

"울 엄마인데 내가 모르냐. 그런 거 아니다. 넌 왜 그렇게 오해를 하고 그러냐"

평소에는 없던 효심이 왜 이때 분출된 것인지,

엄마 편이 되어 몇 마디 한 뒤로 얼어버린 그 냉랭함은 잊을 수가 없다.

불만의 타깃이 엄마가 아니라 나로 바뀌게 했다는 점에서 그나마 위안을 삼았다.



다음 명절, 그다음 명절, 또 그다음 명절까지 이 패턴은 반복이 되었다.

난 학습을 했다.

이 대화에 등장하는 엄마는 내 엄마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한결 마음이 편했다.

"그러게 엄마는 왜 그랬대?"라는 동조의 피드백도 쉽게 나왔다.

'왜? 그건 '남의 엄마' 이야기였으니까.'



남의 엄마 이야기를 하는 시간은 매 명절마다 짧아졌다.

잘 들어주고 같이 호응하고 맞장구도 쳐주고 하니

와이프가 느끼던 분노의 감정도 빨리 사그라드는 듯했다.



그렇게 또 몇 해가 지났다.

이제 남의 엄마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아내도 학습을 한 듯하다.

아무리 용을 쓰고 화를 내도 달라지는 게 없는 현실에 대해서.



코로나가 왔다.

명절이라도 가족들이 모이지 않게 되었다.

모이지 않으니 명절 준비의 규모가 작아지고 그러다가 없어졌다.



코로나가 끝이 났다.

한번 없어진 번거로움은 다시 부활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섣불리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사람들이 잘 먹지 않는 제사 음식 말고 우리가 먹고 싶은 것 해서 나눠먹는 명절을 보내고 싶다던

지금 생각하면 참 합리적인,

몇 년 전만 해도 전통과 조상을 무시하는 불경한 생각으로 치부했던

아내의 바람이 드디어 이뤄졌다.



명절 전 몸이 먼저 알아채는 싸한 냉기,

명절 당일 아침부터 몰려오던 알 수 없는 두통이 사라졌다.

코로나 덕에 나는 처방전을 받았다.

다음 주 긴 연휴가 전혀 두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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