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ㅇㅇ고 총동창회입니다."
전화를 받고 잠시 멈칫했다.
졸업 후 단 한 번도 나가지 않은 동창회인데, 웬일일까.
고등학교 친구 몇 명과 십 년 넘게 이어온 계모임은 있지만,
'총동창회'라는 글자는 내 일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여전히 OO에 계시죠? 과장님, 아니 이제 부장님이신가요?"
"아… 네네."
얼떨결에 대답하는 사이,
20년 넘게 다닌 회사의 직급과 주소가
그들의 명부 안에서 말끔히 업데이트되었다.
한 달전쯤 일이라 잊고 있었는데,
어제 퇴근 후 현관 앞 택배 상자에서
묵직한 책 한 권을 발견했다.
비닐도 뜯지 않은, 빳빳한 '총동창회 명부'.
그리고 그 옆엔, 친절하게 동봉된 지로 용지 한 장.
아내는 '이게 다 뭐야?' 하는 표정으로 나를 봤다.
나도 어이가 없었지만, 소파에 앉아 비닐을 뜯었다.
생각보다 잘 만든 동창회 명부였다.
졸업 연도별, 직장별, 지역별.
엑셀로 정렬이라도 한 듯 깔끔하게 분류되어 있었다.
30년 전 동창 명단을 손가락으로 따라 내려가며
잊고 지낸 이름들을 만났다.
튀어나오는 이름 하나하나가
꽤 반가웠다.
'직장별 찾아보기'는 특히 흥미로웠다.
"이 친구 의사 됐네."
"이 녀석은 사장이네."
그리고 내 회사 섹션을 펼쳤다.
익숙한 이름들이 눈에 띄었다.
'아, 이 사람...'
옆 셀에서 유난히 큰 목소리로 통화해서 몇 번 눈을 흘겼던 그 사람은
고등학교 4년 선배였다.
매일 아침 셔틀버스에서 마주치던 사람은 3년 선배.
심지어 후배 중엔 벌써 임원이 된 친구도 있었다.
궁금해서 회사 조직도에서 그 후배의 얼굴을 찾아보기도 했다.
페이지를 이리저리 넘기며 재밌어하는 내 모습을 지켜보던 아내가 말했다.
"참 부질없다. 동문이라니,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설마 동문회 나가려는 건 아니지?"
"아이고.. 내 성격 알잖아. 어딜 기웃거리겠어."
쓴웃음을 지으며 명부를 덮었다.
아내 말이 맞다.
당장 내일 출근해서 그 4년 선배에게
"선배님!" 하고 인사할 것도 아니고,
아침에 만날 셔틀버스 3년 선배에게 어깨동무를 할 일도 없다.
그들이 뭘 하고 사는지 알아낸들,
내 인생에 달라질 것은 하나도 없다.
부질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한참을 들여다봤다.
'와, 이 친구 잘 살고 있네.'
그 마음 하나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 친구도,
수많은 이름 사이에서 내 이름을 찾았을지 모른다.
'야, 이 녀석. 아직 잘 버티고 있네.'
서로의 안부를 직접 묻지 않아도,
30년의 세월을 건너
'너도 잘살고 있구나' 하는 마음이 닿는다면
그건 부질없다고만 할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두꺼운 명부와 지로 용지를
책장 한쪽에 살짝 밀어뒀다.
언젠가 문득, 이름 하나가 또 궁금해질 때 꺼내볼지도 모를
추억의 명부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