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레이스
7166일째, 너와 헤어졌다.
아니, 내가 너를 버렸다고 말하는 편이 맞겠다. 19년을함께한 존재를 떠나보내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네가 가는 모습을 보지 않았다. 보고 싶지 않았다는 말이 더 솔직하다.
아무 말 없이 헤어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너의 뒷모습은 너무 지쳐 보였고 이미 오래전부터 할 말을 다 써버린 사람 같았다. 그 모습 앞에서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헤어지고 나는 허전함을 견디지 못해 곧바로 새로운 아이를 만났다.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 움직였고 내 손이 닿아야 할 자리가 분명했는데, 새로운 아이는 굳이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처럼 혼자서도 너무 잘 해낸다. 친해져 보자고 말을 걸어도 그 능숙함이 오히려 나를 밀어낸다.
내 손이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에도 없는 느낌. 눈이 바라보는 세상은 더 넓어졌는데 마음은 자꾸 불안해진다. 편리함과 안정은 꼭 같은 말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해준다.
이건 19년 넘게 탄 자동차를 폐차장으로 보내고 새로운 차를 맞이하는 요즘 나의 이야기다.
초록색 번호판에서 하얀색 번호판으로 바꾼 정도의 변화가 아니다. 20년 가까이 된 아반떼 XD는 나의 신혼과 세 아이의 탄생, 전라도와 경상도, 강원도와 경기도,그리고 서울까지 내 삶의 방향을 묵묵히 함께 지나왔다.
말이 없었고 불평도 없었고 힘에 부쳐도 고쳐주는대로 그 자리에 있었다.
나는 늘 ESTJ다. 어디서든, 어찌해도 그렇다. 그런데 관계 앞에서는 나에게도 분명 F가 있다.
나는 사람들 앞에서 괜찮은 척을 잘한다. 단단해 보이고 잘 버티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상처도 많고 혼자 울컥하는 순간도 많다.
자동차를 보내면서 사물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는 내 모습이 조금 낯설었다.
가족들 몰래 차를 쓰다듬으며
“고생했다”
는 말을 건네고 혼자 울고 있는 나를 알았다. 그때 처음 알았다.
'나는 생각보다 관계에 마음을 많이 쓰는 사람이구나.'
그리고 늘 나는 궁금한 것이 있다.
'사람들은 처음 나를 보면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할까.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그 생각은 얼마나 달라질까.'
특히 ‘사모’라는 이름이 내 이름보다 먼저 보이는 순간,관계는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한다. 설명되어야 하는 사람이 되고 조심해야 하는 사람이 되고 끝내는 나로 머물기 어려워진다. 그래서인지 오래 남는 관계들은 늘 비슷하다.
내가 사모가 되기 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들,혹은 사모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고 그냥 나를 나로 봐주는 사람들. 욕도 하고 화도 내고 성질도 부리는 나를 그대로 받아주는 관계. 그 안에서 나는 진짜 나로 숨을 쉰다.
생각해보면 나의 아반떼 XD가 그랬다. 설명하지 않아도 됐고 잘하려 애쓰지 않아도 됐고 그냥 함께 가면 됐다. 지금의 나는 새로운 차를 아가 다루듯 조심스럽게 대하며 거리 조절을 하고 있다.
관계도 그렇다.
어떤 관계에서는 나는 애써 괜찮은 사람이 되고, 어떤 관계에서는 그냥 나로 남는다. 차를 보내며 나는 알게 됐다.
나는 여전히 잘하는 관계보다 편해지는 관계를 기억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 같은 시간들이 결국은 가장 많은 걸 남긴다.
성질 좀 부려도 어때? 나도 사람인데!!
관계에서 눈치 보지 말고 나로 잘 살아가 보기로 한다.